[동호동락] 김형풍 <진흥전자 부회장> .. '늘푸른회'

난방용 석유날로와 취사용 석유풍로로 한때 이름 났었던 "하아파이사"출신들의 모임인, 늘푸른회(7형제)피를 나눈 친형제처럼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큰아빠 둘째아빠 셋째아빠. 큰엄마 둘째엄마 셋째엄마. 이렇게 부르면서 지내온지가 어언 2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유치원의 코흘리기였던 딸 난주가 시집을가 두 외손녀를 보았고 내 나이 육순이 되었으니 까마득한 옛날얘기가 되어버린것 같다. 1967~9년도에(하이파이사)에서는 일제 나쇼날 석유난로 부속품을 수입하여 조립한 제품을 판매 하였는데,그 인기가 대단했다. 그당시 국내 최초로 바겐세일이라는 판매전략을 도입하여 실시 했을때는 인파가 잘사진을 이루어 그 줄이 반도조선아케이드 정문에 위치한 점포에서 시청앞 백남빌딩까지 늘어서서 경찰관이 정리를 해줄 저도였다. 그리고 우리 모르게 알게 금성사 삼성사 영업부요원들도 세일즈기법을 구경하곤 했었다. 제품광고역시 타사의 추종을 불허 하리만큼 앞서 있었다. 어느정도의 수준이였는가하면 일간스포츠 창간호(칼라판)앞면 5단통을 "하이파이사"가 메꾸었고 여성중앙 창간호 표지 면도 "하이파이사"가 차지할 정도였다. 그당시 상업방송 문화방송(MBC)이 종로 인사동 입구 동인가구4층에 자리잡고 있을때 20초 스파트를 두배로 처음 시도할 정도로 적극적인 세일즈기법을 발휘했다. 이러한 판촉활동은 전국 도청 소재지까지 휩쓸고 다닐정도였고 회사는 급성장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가 기울기 시작했다. 뛰어난 광고전략과 세일즈기법으로 팔기는 잘 파는데 반품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리한 국산부품교체 시설확장으로 품질관리가 허술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부도가 났다. 그때 그시절! 너무 좋았던 팀웍.그래서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 그 숱한 사람들중에 마음에 맞는 일곱명이서 형제의 서열을 정해 친목회를 만든것이 바로 "늘 푸른회"모임이다. 맞형은 정원설계업을 하는 김정국씨, 둘째는 양명석(리만전자사장),셋째는 필라이고, 넷째가 채현(모 선박회사이사), 다섯째는 치규성("옛집"식당경영), 여섯째가 이순남(리만전자전무), 막내는 이상현(한국콘도사장)이다. 양명석씨의 아들 진호의 돐때 모여서 친목회를 만들었고 그 친호가 이제 스믈다섯이 되었으니 우리 모임도 아느듯 4반세기가 흐른셈이다. 초창기만 해도 큰형네 두아이들,둘째형네 두아이들과 두아이들까지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을 늘 푸른회비에서 지급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재정이 바닥나서 그렇지 못하고 있어 그 후의 아이들한테는 미안한 마음이다. "늘 푸른회"이름도 싱싱하고 자랑스럽고 보람찬 모임으로 매월 셋째 토요일에 주로 둘째네 사무실에서 모이고, 추석과 정월에는 반드시 우이동 큰형네에서 밤을 새워가면서 우의를 다지고 즐긴다. 이젠 아이먹고 늙어가고 있어서인지 아이들은 커서 저희들끼리 어울린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늘 푸르게 지낼수 있도록 기원해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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