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자금시장] (4) 자금난 허덕이는 중소기업

직원 18명을 두고 성남에서 섬유공장을 하는 이모 사장(42)은 요즘 시중에 돈이 많다는 통화당국의 얘기를 곧이 듣지 않는다. "담보력이 모자라는 영세 중소기업에게는 많이 풀린 돈을 만져볼 수 없으니 통화량 증가는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항상 자금난에 쫓기면서도 그럭저럭 회사를 꾸려나가는 이사장이지만 요즘처럼 금융기관 문턱이 높았던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은행에서는 자금사정이 안좋다는 이유로 대출 "올 스톱"상태에 있다. 금리는 높지만 돈빌리가 쉬워 오래전부터 서울강남에 있는 H금고를 거래하는 이사장은 이달초 3개월짜리 어음을 할인하면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작년말까지도 연 17%하던 할인금리가 어느새 19.5%까지 올라버렸기 때문.1억원 어치의 어음을 할인받는다고 외치면 두 달전보다 연 2백50만원을 앉아서 손해보는 셈이다. 대기업이 끊어준 어음을 할인할 때는 그래도 괜찮은 편에 속한다. 신용도가 조금만 떨어져도 어음할인 자체가 힘들어진다. 신용금고에서도 담보를 요구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이 뒤따른다. 담보라고는 공장과 집이 고작인 이사장은 결국 마지막 보루 "사채시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사채시장의 어음할인 금리는 부르는 게 값이다. 잘 받아야 연 24%.연간 어음 할인 규모가 1억원이라면 연 2천4백만원이 금융비용으로 날아간다. 세금혜택을 못받는것까지 친다면 부담은 더 커진다. 사채업자들도 최근 중소기업 부도율이 높아지면서 본업인 어음할인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은행신탁이나 투금사의 고금리 단기금융상품에 돈을 굴려 재미를 T&C1 B0보고 있다. 사채시장마저 돈이 돌지 않으니 이래저래 중소기업만 죽을 지경이다. 자동차 부품공장을 하는 김모사장(46)은 최근 경기가 좋아지자 공장시설을 좀 늘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투자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속만 끓고 있다. "은행대출을 위해 신용보증기금과 기술신용보증기금에 보증을 신청해 놓은 지가 이미 6개월이 넘었는데도 묵묵부답입니다. 이들 기금도 보증여력이 바닥났으니 무작정 기다리라는 겁니다" 김사장 주변에는 최근 당좌대출금리가 시중실세금리에 연동돼 연15%대에 이르는 등 자금비용이 늘어나자 아예 문을 닫는 공장이 늘고 있다. 김사장도 며칠전 공장을 운영하는 것보다는 현금을 마련해 투금사의 기업어음(CP)나 은행권의 양도성예금증서(CD)를 사두는 게 훨씬 낫다는 충고를 금융기관에 있는 친구로부터 듣고는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이들 상품의 수익율이 연17%를 웃돌고 있어 10억원만 굴리면 연간 1억7천만원을 가만히 앉아서 벌수 있다는 얘기다. 자금난과 고금리 현상으로 오히려 중소기업들의 사업포기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중소기업이라고 해도 사업을 하다보면 사업규모를 확충할 때가 있지요. 요즘이 그런 때인데 투자비를 마련하지 못해 회사를 팔아달라고 의뢰하는 경우가 부쩍 늘고 있습니다"(KTB건설팅 이순원 수석컨설턴트). 지난 92년12월 중소기업 대상까지 받았던 한국기체공업(주)이 구천수사장이 자금난에 따른 사업실패를 비관해 자살해 충격을 준 일이 있다. "최근들어서도 제2,제3의 구천수 사장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에 "부익부 빈익빈"현상이 심해지는 요즘의 자금사정은 영세한 중소기업에게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부도를 낸 중소기업 사장들이 "칠전팔기"를 하자는 취지로 결성한 팔기회의 윤한기사무국장은 지난 1월에도 중소기업 사장 3명이 사업실패를 비관해자살했다고 말했다. 지난 92년 7월 발족당시 31명이었던 팔기회 회원은 최근 중소기업의 부도가 늘면서 회원이 급증,현재 5백40여명에 이르고 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권대일세제금융과장은 "웬만한 중소기업을 위한 상업어음할인 증액등의 지원정책도 필요하지만 종업원 20인이하의 영세 중소기업을 위해선 소액보증을 해주는 지역신용보증조합 설립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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