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맨' 김과장, 남몰래 화병 앓는다고?
정모씨(40)는 주변 사람들에게 ‘젠틀맨’으로 통한다. 배려심 깊은 언행에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한다. 좀체로 화를 내지 않는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지인들도 그가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정씨에게는 남모를 속사정이 있다. 화가 나는 일은 많지만 신사답다는 이미지가 구겨질까봐 화를 내고 싶어도 못 낸다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 혼자 우울해할 때가 많았다. 결국 남몰래 병원을 찾은 정씨에게 의사는 ‘화병’이라고 진단했다.

정씨처럼 감정 표현이 서툴거나 주변 분위기 때문에 혼자서 끙끙 앓는 사람은 주변에 적지 않다. 대학생 권모씨(21)는 “화가 나도 친구들에게서 ‘쿨하지 못하다’ ‘속이 좁다’는 말을 들을까봐 웬만하면 참는 편”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송모씨(35)도 “상사가 내린 업무 지시가 부당하다고 느껴도 항의하면 ‘일을 못해서 그런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참는 편”이라고 했다.

'젠틀맨' 김과장, 남몰래 화병 앓는다고?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화병이 고부 갈등을 겪는 며느리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지만 요즘은 학생이나 직장인 환자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화병은 답답한 나머지 두통, 소화불량, 불면증 등 신체 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의 일종이다. 울화병이라고도 한다. 신경전달물질에 이상이 생겨 나타난다. 하지만 정식 의학용어는 아니다. 윤 교수는 “화병은 편의상 부르는 용어”라며 “의학적으로는 따로 분류되지 않고 우울증으로 같이 묶인다”고 말했다.

화병은 문화증후군이다. 문화증후군이란 특정 문화에서 발생하기 쉬운 정신질환을 말한다. 화병은 ‘참는 게 미덕’이라는 문화와 억울함, 분(憤), 한(恨) 등 한국 특유의 정서에서 기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우울증까지 이어졌다고 보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증후군으로 여겨진다. 미국 정신의학회는 1994년 화병의 영문명을 우리 발음대로 ‘Hwa-byung’이라고 표기하고 한국의 문화증후군으로 정의했다.

윤 교수는 “물론 화병에 해당하는 증상이 한국에서만 관찰되는 건 아니다”며 “문화증후군은 해당 지역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져 이름이 붙은 것일 뿐”이라고 했다. 일본의 문화증후군으로는 사람을 만나면 불안해지고 몸에 이상 증상이 나타나는 ‘대인공포증’이 있다.

전문가들은 화를 못 내는 게 화병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오히려 화병에 안 걸린다는 것이다.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풀리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화병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 대부분이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감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화병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공감해주고 소통할 수 있는 친구, 가족, 연인 등이 곁에 있는 것도 좋다. 윤 교수는 “화병은 답답함으로 시작해 응어리가 안 풀리면 무기력해지고,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며 “마음 맞는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운동, 여가생활 등으로 다른 탈출구를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증세가 심하면 우울증 치료처럼 약물 치료하는 방법이 있다.

임락근 기자 rkl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