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개지는 EU…신 고립주의, 세계 경제질서 흔든다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브렉시트)하기로 했다. EU에 가입한 지 43년 만이다. 23일(현지시간)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치러진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영국 국민의 51.9%가 ‘EU를 떠나자’는 쪽에 표를 던졌다. EU에 남아있자는 쪽은 48.1%에 그쳤다.

세계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벌어졌다. ‘잔류’를 예상하고 일찌감치 샴페인을 터뜨렸던 금융시장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영국 및 신흥국 주식과 통화 가치가 급락했다. “영국이 EU 탈퇴 쪽으로 결정하면 금융시장은 ‘검은 금요일’이 될 것”이라던 헤지펀드 거물 조지 소로스의 예언이 현실이 됐다. 브렉시트를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안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오는 10월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영국이 EU 탈퇴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규제 중심으로 흐르는 EU 집행부에 대한 불만, 과도한 재정 분담에 대한 반발 등이 그 시발점이었다. EU라는 거대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였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속되고 있는 세계 경제의 장기 불황이었다. EU 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 이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사람들의 불안감, 영국인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EU 탈퇴를 부추겼다. 많은 사람이 “EU에 남아 있으면 점점 더 많은 비(非)영국인이 우리 삶터와 일자리를 점령할 것”이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극우파 영국독립당(UKIP)의 나이절 패라지 대표가 기나긴 난민 행렬 사진을 내걸고 “이들을 받아들일 것이냐, 지금 당장 EU를 떠날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인 것은 이를 상징하는 한 장면이다.

브렉시트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주요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흐름이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가 인기를 끄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미국은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돈을 쓰지 말고 자국민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주장이 먹혀들었다.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신(新)고립주의에 많은 미국인이 공감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추진해온 ‘아베노믹스’도 자국 이기주의를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정책이다. 엔화의 통화가치를 급격히 떨어뜨려 일본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주변국을 황폐화시키는 ‘근린궁핍화 정책’이다. 브렉시트 역시 유럽연합(EU) 경제공동체에서 벗어나 자국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경제주권을 찾아오자”는 목소리가 영국에서 힘을 얻은 이유다.

상품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사람들까지 자유롭게 이동하고 경쟁하도록 놔두자는 자유주의의 정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문명사회가 추구해온 큰 가치였다. 저마다 문을 걸어닫고 높은 장벽을 세운 보호무역주의가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통렬한 반성은 상호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세계질서를 탄생시켰다. 인류의 눈부신 번영이 이어졌고 빈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서까지 광범위하게 퇴출됐다.

하지만 대공황에 버금가는 글로벌 경기불황을 맞아 세계는 다시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브렉시트는 유럽 균열의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일 가능성이 크다. 도미노처럼 탈퇴가 이어져 EU 붕괴, 나아가 세계의 새로운 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

벌써부터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체코 등 각국 극우정당들은 “당선되면 EU 탈퇴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약속하며 바람몰이를 하고 있다.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EEC)로 첫발을 디딘 뒤 59년간 통합의 길을 걸어온 유럽은 빗발치는 분열 요구에 힘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중국·EU 3개의 축으로 구성된 세계 경제의 한 축이 무너지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군사적인 힘의 균형이 깨질 수 있다. 한국도 그 풍랑 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