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신경영 성공은 잊고 리셋하라"
후쿠다 다미오(福田民郞) 전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교토공예섬유대 명예교수·사진)은 1993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 선언’ 도화선이 된 ‘후쿠다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이다. ‘삼성이 양적 성장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보고서 내용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재탄생했다. 지난 7일 신경영 선언 22주년을 맞아 후쿠다 전 고문은 삼성 직원들에게 “신경영은 잊으라”고 강조했다. ‘과거의 성공에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혁신하라’는 뜻이라고 했다. 지금 삼성에 필요한 단어는 ‘리셋(reset·재시작)’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후쿠다 전 고문은 삼성 사내 미디어인 ‘미디어삼성’과의 인터뷰를 통해 신경영 선언 22주년을 맞는 소회를 밝혔다.

○“2류에서 1류 된 성장 신화 잊어야”

후쿠다 전 고문은 “지금 삼성은 1류기업으로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며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임직원 전체가 고민하지 않으면 삼성의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1993년엔 사원 수도 적고 기업 규모도 크지 않아 혁신이 상대적으로 쉬웠다”며 “반면 지금은 글로벌 기업이 된 데다 임직원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어 혁신이 훨씬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런 때일수록 혁신에 뜻을 모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삼성, 신경영 성공은 잊고 리셋하라"
후쿠다 전 고문은 1989년 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디자인 고문으로 삼성과 인연을 맺었다. 1993년 6월7일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 기폭제가 된 후쿠다 보고서를 만들었다. 당시 그는 이 회장으로부터 삼성 제품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담은 보고서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56장 분량의 보고서를 건넸다. 보고서엔 날카로운 지적이 가득했다. 그는 “그때만 해도 일본 소니가 1류, 파나소닉은 1.2류, 샤프는 1.5류였고 삼성전자는 1.5류에도 못 미치는 2류에 불과했다”며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짝퉁’ 제품으론 세계시장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점을 당부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디자인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도 보고서에 담았다. 예컨대 설계자가 제품 스펙(사양)을 다 정하고 디자이너에게 통보하는 식이 문제라고 했다. 소비자를 생각한다면 디자이너가 먼저 제안해야 하는데 삼성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였다. 또 상사가 하는 말은 모두 맞다고 여기는 문화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독일행 비행기에서 이 보고서를 본 이 회장은 화를 내며 삼성 임원 200여명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해 신경영 선언을 했다.

후쿠다 전 고문은 “신경영 선언을 계기로 삼성 내부에 ‘지금처럼 하면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조성됐다”며 “혁신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삼성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1993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매출이 약 30배 늘어났다”며 “엄청난 기세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항상 미래만 얘기”

후쿠다 전 고문은 후쿠다 보고서를 제출하기 이틀 전인 1993년 6월5일 일본 도쿄에서 이 회장을 만났을 때의 기억도 전했다. 그는 “오후 8시30분에 시작한 미팅이 밤 12시가 다 돼 끝났다”며 “그렇게 긴장했던 적은 없었다”고 돌아봤다. “세계시장에서 한국 디자인 수준이나 경쟁사의 디자인 평가 같은 질문에서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까지 다양하게 나와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또 “다양한 분야에 지식을 갖고 있어 감탄했고, 천천히 말씀하지만 질문이 굉장히 날카로웠다”고 회상했다.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준비하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기업의 경쟁력은 혁신센터 역할을 하는 부서가 얼마나 많으냐가 좌우한다”며 “연구소는 연구소대로, 영업은 영업대로 각 분야 혁신을 위해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5년 뒤 결과가 나온다”며 “지금 당장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삼성의 10년 후는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이 업종을 바꾸며 새 먹거리를 찾는 것처럼 삼성도 변화에 대한 결단을 내릴 때라고 조언했다.

후쿠다 전 고문은 “이 회장은 항상 미래만 얘기했다”며 “다시 만난다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하면 좋을지에 대해 듣고 싶다”고 말을 맺었다.

정지은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