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쌈짓돈' 전락한 예비비 1조2000억원
정부가 예기치 못한 예산 사업 등에 쓰기 위해 마련해둔 예비비를 매년 똑같은 이유로 수천억원씩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수 부족으로 국고보조금 사업 수를 줄이는 등 강력한 세출 구조조정에 나선 정부가 정작 예비비는 국회 심의를 피해 ‘쌈짓돈’처럼 쓴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국무총리실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19일 국무회의에서 국가배상금과 형사보상금 예산으로 1657억원을 추가로 배정하는 ‘2015년 일반회계 일반예비비 지출안’을 심의·의결했다. 정부는 매년 전체 예산의 1% 내외의 예비비를 확보해 예산이 부족한 부처가 요구하면 기재부 심사를 거쳐 지출 여부를 결정한다. 올해 예비비 예산액은 3조64억원으로 전년(3조5354억원)보다 5290억원 감소했다. 하지만 이 중 자연재해 대비, 지방정부 보조 등 지출 목적이 정해진 목적예비비가 아닌 어떤 곳에든 쓸 수 있는 일반예비비는 작년과 같은 1조2000억원에 달한다.

◆예비비 비중이 88%

국가배상금과 형사보상금 예비비는 법무부가 관련 예산이 부족하다며 요청한 것이다. 법무부는 지난해에도 국가배상금 명목으로 1814억원의 예비비를 받아 썼다. 2012년과 2013년에도 각각 1042억원과 417억원의 예비비를 같은 이유로 사용했다.

지난해 국가배상금 지급액에서 예비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88.5%에 달했다. 그만큼 예산을 허투루 짰다는 얘기다. 특히 매년 같은 용도로 예비비 지출이 되풀이된다는 것은 ‘예측 가능성이 높다’는 뜻으로 ‘예측 불가능한 용도’에 사용한다는 예비비의 기본 취지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매년 국회는 물론 지난달에는 감사원에서도 법무부의 국가배상금 예산이 과소 편성돼 국가 재정 운영을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지만 정부는 예년처럼 예비비를 책정했다.

정부세종청사 공무원의 통근버스 운행비 명목으로도 2년 연속 예비비가 투입됐다. 정치권과 지방정부의 요구로 버스 대수를 줄이기로 하고 관련 본예산을 줄였지만 공무원 반발로 버스 대수를 줄이지 못하자 부족한 예산만큼 예비비가 쓰였다. 올해도 애초 하반기부터는 수도권 통근버스를 월요일과 금요일만 운행하고 평일에는 운행하지 않기로 했지만 또다시 공무원 반발로 없었던 일이 되면서 예비비가 투입될 예정이다.

◆“국회 심의 피하는 데 악용 우려”

연례적으로 예비비를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본예산에 반영해 국회 심의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던 경우도 있다. 지난해 국무총리실은 규제개혁 홍보 명목으로 14억원의 예비비를 썼지만 본예산에 이미 규제개혁 사업 예산이 잡혀 있었다. 기재부도 지난해 공공기관 관리를 위해 13억원의 예비비를 받아 썼는데 본예산에 관련 예산이 이미 배정됐다. 총리실과 기재부는 지난해 관련 사업을 진행하면서 54.8%와 23.3%씩 예비비로 충당했다. 국회예산정책처 관계자는 “두 사업 모두 정부가 예상치 못해 갑자기 예산이 늘어난 경우라고 보기 어렵다”며 “국회 심의 과정에서 특정 사업의 예산이 깎이거나 신설이 막히면 예비비가 관련 재원을 늘리거나 새로 도입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매년 3000억~4000억원 규모로 지출되는 ‘국가안전보장을 위한 활동경비’도 예비비로 충당된다. 정부는 국가안전보장 업무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예산회계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국정원 예산을 예비비로 잡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해당 예산의 구체적인 사용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예산 낭비 우려가 있다며 본예산으로 배정해 국회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종=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