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경제발전 없인 어떤 이데올로기도 무력…투자 결합한 개혁·책임기반 복지 필요"
‘700년 만의 역사적인 화해’로 전 세계가 주목했던 지난 8일 마이클 히긴스 아일랜드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과 공식 만찬에는 마틴 맥기니스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수석장관도 자리를 함께했다. 70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일랜드는 1921년 영 연방에서 독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영 연방에 남은 북아일랜드는 1997년까지 분리독립 투쟁을 계속했다.

이런 양국 간 갈등을 봉합시킨 사람이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사진)다. 1997년 야당인 노동당이 18년 만에 총선에서 압승해 43세의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된 그는 북아일랜드를 방문해 19세기 영국인의 착취로 아일랜드인 200만명이 굶어죽은 대기근에 대해 사과했다. 이듬해에는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수립 등을 골자로 한 ‘성(聖) 금요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자 아일랜드공화군(IRA)과 영국 정부의 상호 사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일랜드 방문 등이 이어지면서 화해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책마을] "경제발전 없인 어떤 이데올로기도 무력…투자 결합한 개혁·책임기반 복지 필요"
《토니 블레어의 여정》은 2007년까지 10년 동안 노동당을 이끌면서 총리를 지낸 블레어의 회고록이다. 책에는 총리 취임 이전의 정치적 성장기와 북아일랜드 평화협정과 이라크전쟁 파병 등 총리 재임 시절 국내외 정치활동, 총리 퇴임 이후 세계적 리더로서의 활동 등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블레어에 따르면 명문 사립학교인 페테스칼리지를 졸업하고 옥스퍼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가 자신의 출신 계층과는 거리가 먼 노동당에 입당한 것은 대학 때 만난 호주 성공회 목사 피터 톰슨 때문이었다. 기독교사회주의자였던 톰슨 목사의 영향으로 블레어는 사회주의와 실용주의에 열정을 갖기 시작했다.

1994년 노동당 사상 최연소 당수가 된 그는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공동소유(국유화)’를 규정한 당헌의 핵심 조항부터 고치기로 했다. 그는 노동당이 1992년까지 네 번의 선거에서 잇따른 패배를 겪고, 보수당 정권이 야기한 경기침체에도 득표율이 32% 수준에서 정체된 것은 노동당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진단했다.

총리가 된 뒤 “경제발전 없이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무력하다”고 주장하며 사회정의와 시장경제를 결합한 ‘제3의 길’을 주창한 것은 이런 실용주의의 연장이었다. 그는 “투자와 결합된 개혁을 통해 사람들의 개별적 요구에 신속히 대응하는 공공서비스를 만들고, 권리뿐만 아니라 책임에 기반을 둔 복지국가를 수립해 영국의 현대화 수준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며 “이것이 대다수 국민들이 지향하는 바이자 ‘제3의 길’의 핵심 내용”이라고 말했다.

블레어는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전통적인 노동당 지지자는 물론 중산층의 표심까지 끌어모았다. 그 결과 재임 기간에 북아일랜드 분쟁 종식, 지속적인 경제성장, 공공서비스 개혁 등에 성공했고 유럽의 중도좌파 정치가들이 잇달아 제3의 길을 따르면서 ‘블레어리즘’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기도 했다.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기 위한 이라크전쟁 파병을 비난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후세인을 권좌에 두었다면 어땠을까”라며 “지금은 적어도 우리의 미래가 우리 손에 있다”는 이라크 사람들의 말로 답을 대신한다.

블레어는 이 책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죽음부터 테러와의 전쟁까지 최근의 중요한 사건에서 자신이 수행한 역할을 밝히는 한편 노동당 인사들과의 관계, 넬슨 만델라, 빌 클린턴, 블라디미르 푸틴 등 세계 지도자들에 대한 평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시장과 기업의 힘을 지나치게 키웠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국을 비롯한 세계의 현재 상황에 대한 진단과 미래 전망을 밝히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는 더 빠른 속도로 개혁을 추진할 기회를 잡았어야 했다. 사회적 연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세상에서 효과적인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모든 사항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시 평가하고,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

블레어가 3년간 썼다는 이 책은 460만파운드(약 85억원)의 높은 선인세로도 주목받았고 출간 즉시 아마존닷컴 등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1000쪽을 넘는 책의 분량이 다소 부담스럽지만 깔끔한 번역 덕분에 읽기가 지루하지는 않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