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서 킹 목사가 흑백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한경DB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흑백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한경DB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진보 성향의 백인 교육전문가와 관료들이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을 한 학교에 섞어놓으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스쿨버스를 동원해 흑인 학생은 백인 학교로, 백인 학생은 흑인 학교로 실어날랐다. 여기에 반발하는 백인 부모는 인종주의자로 몰아붙였다.

미국 역사가이자 사회비평가인 크리스토프 래시(1932~1994)는 이에 대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모여 살고 싶은 것은 존중받아야 할 본능”이라며 주류 진보주의자의 사해(四海) 형제주의를 경계했다.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 되지만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감정이나 성향마저 악으로 규정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책마을] 진보는 우월하다고? 엘리트주의 벗어나 소시민 삶에 주목해야
《진보의 착각》은 래시가 사회주의 동구권이 붕괴한 직후인 1991년 출간한 책이다. 래시는 원래 사회주의자였으나 말년에는 가정과 종교의 가치를 역설했고, 온당하고 건전한 사회적 권위와 가치관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미국 진보 진영이 이념적 순결성과 엘리트주의에 매몰됐다고 비판한 이 책의 원제는 ‘참되고 오직 하나뿐인 천국(The True and Only Heaven)’이다. ‘참되고 오직 하나뿐인 천국’은 진보가 표방하는 이상향을 비꼰 표현이다.

래시는 미국 진보주의자들이 동성애나 흑백 통합 문제에서 백인 서민의 보수성을 바로잡아야 할 ‘교정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며 이를 ‘일방주의’와 ‘엘리트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 남부에서 마틴 루서 킹의 흑백 차별 철폐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은 남부에 탄탄한 흑인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부에선 이 운동이 벽에 부딪혔다. 북부에선 공장의 저임금 노동자로 혹사당하던 흑인들이 원한에 사무쳐서 과격한 구호를 외쳤고, 그 결과 민권운동에 공감했던 백인들마저 등을 돌렸다고 래시는 지적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래시는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 두 진영은 생산물의 분배를 놓고 극심한 갈등을 빚었지만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긍정하고 대량 생산을 통해 생활 수준을 계속해서 높일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 유한한 자원을 가진 지구가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소비를 견뎌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충족하는 ‘참되고 오직 하나뿐인 천국’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냉전에서 승리한 보수 진영도 마찬가지다. 승자의 종말도 머지 않았으며 한계를 받아들일 줄 모르고 자원을 탕진하는 시스템으로는 그 말로가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그는 이념보다는 그간 도외시한 결과 무너졌던 사회·문화적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 진보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노동의 즐거움, 안정된 관계, 가정생활, 향토애, 역사적 귀속감 등 정신적 가치의 회복이다.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평범한 개인들의 개별적 속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래시는 삶의 고통과 한계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성찰하는 ‘서민적 영웅’과 ‘서민주의’야말로 지금 진보 진영에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서민주의라는 용어다. 영어로는 ‘populism’인데 대중인기영합주의라는 일반적인 뜻과 달리 여기서는 ‘인생의 비참함을 알면서도 자립과 책임, 검약과 절제를 중시하는 미국 중하류층의 특성’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