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5공 경제대통령' 김재익…자유시장경제 씨앗 뿌리다
“저의 경제정책은 인기가 없습니다. 기존의 기득권 세력들도 결코 이런 정책을 환영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반드시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저항이 있더라도 제 말을 믿고 이 정책을 끌고 나가 주시겠습니까?”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이 1980년 9월 김재익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할 때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진 대화다. ‘5공화국 경제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김재익 평전》은 1983년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묘소 폭발 테러로 목숨을 잃은 김재익의 삶과 경제사상, 업적을 조망한 최초의 기록이다. 기자 출신인 저자들은 부인 이순자 교수 등 고인의 가족과 친구, 지인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삶의 기록들을 깊이 취재해 ‘소년 김재익’의 씩씩한 모습부터 5공 핵심 관료로 경제민주화를 위해 애쓰다 45세에 요절하기까지 그의 생애를 오롯하게 담아냈다.

저자들은 김재익을 대한민국에 진정한 자유시장경제의 씨앗을 심어놓은 인물로 평가한다. 김재익은 미국 스탠퍼드대 유학 시절 신오스트리아학파의 선구자인 루드비히 폰 미제스의 영향을 받아 자유시장주의에 눈을 떴다. 그는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에서 나온 막강한 권한을 오로지 ‘시장을 바로 잡는 것’에 쏟아부었다. 그가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시절 급등하던 물가가 잡혔고, 저축률이 올라갔다. 또 수입자유화를 통해 개방 경제의 기틀이 닦였고, 통신혁명이 추진됐다. 강력한 개발독재 경제시스템을 유지하던 대한민국 경제가 비로소 자유시장경제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들은 김재익이 기득권층과 가장 격렬하게 부딪치고 가장 무참하게 패퇴한 사건으로 1982년 ‘금융실명제 파동’을 꼽는다. 그의 오랜 벗인 이상우 서강대 교수는 이 사건을 “정치로부터 경제의 해방을 추진하려던 김재익과 이를 저지하려던 신군부 핵심들 간의 사투”로 표현한다. 금융실명제는 김영삼 대통령 때 도입됐지만 ‘1982년의 김재익’이 없었다면 시행이 더 늦어졌을 것이라고 저자들은 평가한다.

이 책은 김재익이 경제민주화를 통해 얼마나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고자 했는지도 생생히 기록한다. 김재익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참여를 결심했을 무렵이었다. 대학생 아들이 “왜 독재정권에 협력하려 하느냐”고 항의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경제의 개방화와 국제화는 결국 독재체제를 어렵게 하고, 시장경제가 자리 잡으면 정치의 민주화는 자연히 따라온다. 아빠가 하려는 일은 바로 이것이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