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 미디어랩 설립자인 니컬러스 네그로폰테가 작년 국내 한 포럼에 왔을 때였다. 그는 스티브 잡스와의 인연을 소개하면서 잡스가 보여준 아이폰 시제품 내용을 모토로라 이사들에게 소개했더니 크게 선전하지 못할 것이라며 무시하더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폰이 등장한 지 4년 만인 2011년 모토로라는 구글에 인수되는 처지가 됐다. 기업 활동의 성장 동력과 미래는 연구·개발(R&D) 성과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은 지속적인 혁신과 신속한 변화가 핵심이기 때문에 국내 정보통신 기업들도 변화와 혁신에 소홀하면 추락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MIT 미디어랩은 R&D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에게 ‘꿈의 공장’으로 통한다. 1985년 당시 MIT 총장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된 제롬 위즈너와 40대 초반의 젊은 MIT 건축학부 교수 네그로폰테가 공동으로 설립한 MIT 미디어랩은 지난 30년간 놀라운 기술들을 선보였다. ‘옷처럼 입는 컴퓨터’, 전자책 단말기에 사용되는 ‘전자잉크’, 제스처를 감지하는 ‘모션 캡처 기술’, 아프리카 어린이들도 쓸 수 있는 ‘100달러 노트북’ 등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2006년 MIT 미디어랩 3대 소장으로 임명돼 5년간 이곳을 이끈 프랭크 모스 교수는 《디지털 시대의 마법사들》에서 ‘마법사와 그 제자들’이라고 불리는 미디어랩의 교수와 학생들이 어떻게 혁신적인 기술을 창조하고 개발하는지를 다양한 사례와 에피소드로 들려준다.

책에는 미디어랩에서 연구하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소개하고 있어 20년 후 미래사회를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디지털로 조작되는, 겹겹이 포갤 수도 있고 접을 수도 있는 전기차 개발 프로젝트 ‘시티카(CityCar)’는 도시를 좀 더 살기 편하고 안전하며 지속가능한 곳으로 만들어 준다. 개인용 가상 주치의를 활용하는 소프트웨어 플랫폼 개발 프로젝트인 ‘컬래버리듬(CollaboRhythm)’은 환자가 집과 일터 등 어디서든 건강을 관리할 수 있게 해준다.

대학·정부·기업 연구소 등의 연구 프로그램은 일반적으로 기초연구와 응용연구 분야로 나뉜다. 하지만 미디어랩에서는 기초연구와 응용연구가 융합된다. 컴퓨터과학자 전기공학자 건축가 음악가 뇌과학자 물리학자 시각예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누구도 자신의 전공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컴퓨터과학자가 디자인과 유아교육을 공부하고, 음악가가 뇌과학을 연구하며, 예술가가 전기공학과 로봇 조립에 능통해지고, 몽상가와 사상가가 실천가와 발명가가 된다. 연구자에게 주어진 가이드라인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그들의 발명이 미래에 사람들의 삶을 확실히 향상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연구가 다른 누군가가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랩은 ‘미디어 예술과학(MAS·Media Arts and Sciences)’이라는 자신들만의 교육과정을 갖고 있다. MAS는 MIT의 다른 정규 과정보다 훨씬 덜 형식적이고 보다 다양한 학문이 융합돼 있다. MAS에서 이수해야 하는 대부분의 과정은 발명과 창조와 체험으로 이뤄져 있다.

미디어랩에 들어오는 학생들 대부분은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하드웨어 디자인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공학 분야의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공구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어 본 경험은 거의 없다. 그래서 첫 번째 학기에 ‘무엇이든 만드는 방법’이라는 수업을 듣는다. 손으로 직접 체험하는 이 수업에선 망치 드릴 용접기 등 기본적인 장비부터 수압절단기, 레이저절단기와 같은 고급 장비와 센서, 디지털 컨트롤러 같은 복잡한 소프트웨어까지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의 사용법을 가르친다. 수업을 마칠 때쯤이면 망치를 들어본 적도 없던 학생들조차 어떤 재료로든 뭐든지 만들 수 있다. 자르고, 분쇄하고, 구부리고, 갈고, 모양을 내는 장비를 모두 다룰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랩의 교수진은 계속해서 학생들에게 위험을 감수하라고 요구한다. 미디어랩만의 고유한 창조적 자유를 활용해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권장한다. 그 결과 모험적인 프로젝트가 하루에도 여러 개, 해마다 수백 개씩 나온다. 그중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이 살아남아 산업계를 뒤흔드는 완전히 새로운 상품으로 출시되거나 심지어 사회 전체를 바꾸어 놓는 혁신적 프로젝트로 성장한다.

저자는 스스로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열정을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바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또한 아이디어와 발명의 초기에는 기업의 핵심 사업과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사람과 산업, 사회에 진정으로 큰 영향을 주는 혁신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변화와 혁신, 진정한 R&D를 위해서는 이종(異種)의 벽을 뛰어넘어 융합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비즈니스 리더들에게 일깨워주는 책이다.

강경태 한국CEO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