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진료실에 고혈압 처방을 받았던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다. 진료 차트를 보니 고혈압 약을 한 달치만 처방했는데, 몇 달 만에야 병원을 찾아왔다. 그동안 약을 드시지 않은 것인지 여쭤봤다. 할머니는 혈압이 오를 때만 약을 드셨다고 한다. 예컨대 할머니가 약을 먹는 경우는 ‘골치가 띵하고 아플 때’뿐이었다. 이럴 때는 한 알씩 처방된 약을 한꺼번에 2~3알도 드셨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가볍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실상 대단히 위험한 경우다.

고혈압은 증상이 없어도 처방해 준 복용 규칙을 지켜야 하는 만성질환이다. 임의로 혈압약을 복용하면 오히려 혈압이 급격히 오르내리는 변동성이 커진다. 다행히 위험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혈압 약을 매일 잘 드셔야 하는 이유를 몇 차례나 설명해야 했다.

얼마 뒤 병원에서 고지혈증 약을 처방받은 환자 150명에 대해 연구 조사할 기회가 있었다. 놀랍게도 환자의 절반(48%)이 한 달간 약을 복용한 후 임의로 병원 방문을 중단했다. 지속적으로 약을 복용해야 할 상황인데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약을 복용해야 하는 규칙을 따르지 않아 추가로 입원한 비율이 전체 입원의 10%나 됐다. 백혈병이나 암·에이즈 같은 중증질환 환자의 경우 문제가 더 심각하다. 약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질병이 악화되거나 재발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환자 스스로 질병에 대한 경중을 판단, 약 복용을 중단해버리는 사례가 많다는 얘기다.

환자들이 약에 대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환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민간요법이나 한방치료는 해로울 것이 없지만 양약은 먹을수록 몸에 해롭다는 편견이다. 그러나 실제로 양약은 과거 경험적으로 사용했던 약초나 민간요법의 재료들로부터 특정 효능이 있는 성분만을 순수하게 추출, 발전시킨 것이 많다. 때문에 그 성분이 무엇인지 모른 채 복용하는 민간요법보다 오히려 부작용이 적고 효과가 확실하면서 용량 조절이 쉽다. 특히 혈압이나 당뇨병·고지혈증과 같이 장기적으로 복용해야 하는 약일수록 안전성이 뛰어나다.

물론 의료진의 관심과 교육도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진료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약물 복용의 중요성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약국에서도 기껏해야 복용법 정도만 교육할 뿐 정작 올바른 약 복용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지 않는다.

약에 대한 환자들의 오해와 무지 그리고 의료진의 무성의가 병을 키우는 형국이다. 건강보험 재정 낭비 요인이기도 하다.

정유석 < 단국대병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