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 관해서라면 소금 같은 동네북도 드물다. 과잉 섭취하면 만병을 부른다고 손가락질 받은 지 오래다. 다 소금이 흔해지고부터다. 소금의 처지가 늘 이랬던 것만은 아니다. 소금은 나라 경제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 요즘의 정보기술산업보다 유망한 업종이 제염업이었다. 그 자체로 권력을 상징하기도 했다. 소금의 생산과 판매는 늘 왕실이 장악했다. 신하(臣)가 소금 결정(鹵)을 그릇(皿)에 두고 지킨다는 뜻의 소금 염(鹽)자가 높았던 위상을 설명해준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월급을 말하는 샐러리(salary)의 어원이 소금(salt)이다. 중세 이후에도 소금 그릇은 황금으로 칠했다고 한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쓴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은 한국의 소금 문화사다. 자칭 ‘소금박사’인 저자가 소금을 통해 들여다본 한국의 역사, 경제, 문화 흐름이 흥미롭다. 저자의 소금 여행은 고려시대에서 출발한다. 13세기 말 고려 충렬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소금을 전매(專賣)했다. 《고려사》충렬왕 14년(1288) 3월에 ‘무신일에 사신을 각도에 파견해 소금을 전매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저자는 충렬왕이 소금 관리법을 원나라에서 배웠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충렬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에 볼모로 잡혔고, 제국대장 공주와 혼인해 원나라의 사위가 됐다. 충렬왕이 제국대장 공주와 혼인한 1274년쯤 마르코 폴로도 원나라에 와 있었다. 17년 동안 원나라에서 생활한 폴로에 따르면 소금은 원나라의 가장 중요한 세원이었다. 조정이 직접 소금을 판매하거나 상인에게 위탁판매하는 방법으로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했다.

소금 전매는 왕실 재정의 충당이 주 목적이었다. 그 처음은 200여개 제후국들이 군웅할거하던 춘추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는 제나라 때 명재상이며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인 관중(管仲)이 중국 최초의 소금 전매론자였다고 말한다. 상인 출신 정치가인 관중은 소금 전매 정책을 실현해 제나라가 춘추오패의 반열에 오르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소금은 세수 확보와 재정 확충을 위해 통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지역이나 시대에 관계없이 항상 ‘짜디 짠 소금정책’이 이어져온 까닭이다. 14세기 말 고려 공민왕 때는 소금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백성들에게 10년간이나 소금이 공급되지 않는 사태도 벌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소금 정책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 중앙과 지방의 갈등 사이에서 권세가와 아전들의 제 잇속 챙기기가 소금 시장에 만연했다. 왜란 때는 소금이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선조 26년(1593) 서애 류성룡이 충주를 둘러보고 올린 장계의 내용이 눈물겹다. ‘이제 충주 등을 살펴보니 지방이 바다와 멀어서 소금이 귀하기가 금과 같으니, 궁한 백성들이 초근목피는 채취했으나 소금이 없어 먹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토정 이지함의 사촌 이산해는 왜란 때 시국을 구제할 수 있는 요체로 ‘소금 굽기’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산해의 사위인 한음 이덕형은 소금 생산 장려책 실시를 주장했다. 그는 소금 생산이 아닌 판매에 관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했다.

저자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염세제 개혁으로 고민한 흔적도 소개한다. 다산은 지방 수령과 하급관리들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이 유리걸식하고 마을이 풍비박산 나는 모습에 분노했다. ‘시랑(豺狼)’이란 시에 그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산은 소금세를 징수할 때 통일된 기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방마다 들쭉날쭉한 소금세 제도를 통일하고 공평하게 징수하기 위한 ‘평미레 개혁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생산자인 염호의 세금을 줄여줘 보호해야 염세를 늘릴 수 있으며, 일기에 따른 소금의 가격 변동폭을 줄이기 위해 소금을 비축하고 또 풀어야 한다는 방안도 제시했다.

저자의 소금 여행은 근대와 현대까지 이어진다. 일제는 밀수입염의 단속을 통해 ‘왕실 재정 죽이기’를 도모했다. 공업용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천일염 위주로 염업을 재편, 조선의 전통 소금인 자염(바닷물을 졸여서 만든 소금)은 쇠멸의 운명을 맞게 됐다. 북한지역에 천일염전을 많이 건설해 해방 이후 혹독한 소금 부족을 겪게 했다. 염전과 소금의 분단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염전 증설은 곧 소금 과잉이란 후폭풍을 맞게 됐고, 이제는 염전 면적을 다시 줄여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됐다고 지적한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