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은 정신과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개인의 사고 속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행동 패턴에서는 그대로 드러났다. (…)루마니아 병사뿐 아니라 독일군 병사도 살아남기 위해 인육을 먹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시체에서 살점을 얇게 잘라내어 끓인 뒤 ‘낙타고기’라고 하면서 나누어 먹었다. 인육을 먹은 자들은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안색이 파리한 대다수 포로들과 달리 얼굴에 붉은 빛이 돌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볼고그라드(옛 스탈린그라드)의 마마예프 쿠르간 전쟁기념비 앞에서 인육을 먹는 포로들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삭막하긴 해도 평화로운 주변 분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은 70년 전 포탄과 총알이 빗발쳤던 전쟁터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0세기 가장 참혹했던 전투의 하나로 꼽힌다. 1942년 8월21일부터 이듬해 2월2일까지의 공방전에서 소련 병사들은 하루 넘어까지 살아있지 못했고, 독일 병사들은 7초마다 1명씩 죽어나갔다. 6개월간 사상자는 200만명에 육박했다. 인간의 광기와 어리석음이 빚어낸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모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영국 유명 역사가인 저자 안토니 비버는 1941년 6월 히틀러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시작된 독소전쟁의 추이를 개괄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개 과정을 집중 조명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감 있는 시각이 이 책의 덕목이다. 전쟁 일지, 군목의 보고서, 사적인 편지, 일기, 포로의 진술, 전투 참가자들의 인터뷰 등 다양한 자료를 기반으로 다큐멘터리처럼 촘촘하면서도 생생하게 전장을 재현한 점이 돋보인다.

이 전투에서 패한 뒤 히틀러의 모습은 독일의 전격전을 만든 발터 구테리안의 눈을 통해 묘사된다. “왼손을 떨었고, 등이 굽었고,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은 튀어나왔지만 예전의 그 광채는 볼 수 없었다. 뺨에는 붉은 반점들이 나 있었다.”

그러나 독일 공군 2인자 에르하르트 밀히의 눈에 비친 히틀러는 여전히 독기를 품은 냉혈한이었다.“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에서 그 많은 생명을 허비한 것에 대해 조금의 유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판돈을 더 올려 더 많은 생명을 사지에 내몰 생각에만 골몰해 있었다”는 것이다.

권력자의 오만과 독선, 그로 인한 오판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가져다주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격수 바실리 자이제프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주드 로 주연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보면 책에서 묘사된 전투 현장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겠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