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 영국 사회에 희망을 주려 했던 《역사란 무엇인가》, 러시아를 통해 영국사회의 문제 해결 방안을 찾음으로써 지금까지도 소비에트 연구의 독보적인 고전으로 평가받는 《소비에트 러시아사》, 제1차 세계대전 같은 참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 필요한 국제질서를 제시했던 《20년간의 위기》….

“에드워드 핼릿 카를 제쳐두고 역사를 논하지 마라”고 했던가. 무려 10년여의 작업 끝에 《E.H.카 평전》이 나왔다. 1980~199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라면 교양과목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역사학자,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E.H.카다.

책은 단순히 《역사란 무엇인가》와 동일시되는 역사학자 카가 아니라 영국은 물론 국제사회 문제해결을 위해 학문적 관심을 지속적으로 넓히면서 자신만의 열정적인 방식으로 현실에 참여했던 카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1944년 52세에 집필에 착수해 33년이 지난 85세 때 완성한 14권의 《소비에트 러시아사》는 카의 이런 지적 여정의 최종 완성품이다. 그 과정에서 1961년 케임브리지대에서 진행한 트레벨리언 강연의 내용을 모아 역사 일반에 관한 입문서로 출판한 것이 카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역사란 무엇인가》다.

저자이자 카의 수제자였던 조너선 해슬럼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카의 수많은 저작과 논문뿐만 아니라 1925년부터 1960년까지 그가 기록한 비망록과 개인적인 편지, 동료들의 회고, 사생활에 대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삶을 재구성했다”며 10년이 넘는 작업기간에 대해 이해를 구한다.

수제자의 입을 통해 본 카는 나치 독일이 러시아에 비하면 자유국가라고 말했할 정도로 거침없었고, 어찌 보면 즉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숱한 저작을 남긴 최고의 역사가로서의 평가와 비판은 차치하고, 평전은 한 인간으로서의 카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역자는 “책이 카의 개인사에 치중해 아쉽다”고 말하지만 공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재미랄까. 인간 카의 외골수적인 성격,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에 대한 편협한 태도 등을 다루는 이야기에선 그저 평범한 노교수의 모습도 보인다.

카는 학창 시절 너무 똑똑한 나머지 동급생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멍청한 친구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고 한다. 서른 둘에 결혼해서는 신혼여행도 가지 않고, 첫 아내인 앤이 그토록 바라던 여유롭게 즐기는 삶에 대해선 경멸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카는 이미 알았던 것일까.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위대한 사람들의 미숙함은 보통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천재들이 일상생활을 잘 꾸려 나가지도 못하고 때로는 자신보다 못한 모습을 보이면 만족해한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