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일상에서 건져올린 老학자의 지혜와 통찰
“앞니 빠진 어린아이의 웃는 얼굴이 나를 기쁘게 했다./…/신새벽에 일어나 먼동이 트는 자줏빛 새벽하늘을 보았을 때,/…/소식을 끊은 사랑하는 이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그의 미소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삶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느꼈다./…/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밤새 내린 첫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을 때, 얼마나 즐겁고 경이로웠던가.”

[책마을] 일상에서 건져올린 老학자의 지혜와 통찰
우리는 살면서 많은 기쁨의 순간을 경험하지만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영문학자 겸 문학평론가인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73)의 에세이집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 준다. 지난 5년간의 사색을 담은 글들에는 작지만 더 소중하고, 평범하지만 더 특별한 삶의 지혜와 통찰이 담겨 있다.

이 교수는 “내가 그동안 저문 강에 이르도록 눈 내리는 들판을 건너오면서도 꺼지지 않은 의식의 눈과 통찰력으로 발견한 삶의 아름다운 진실과 그 내면적인 진실을 언어로 바꾸어 써놓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자기만의 방’ ‘마음의 섬’ ‘시간의 빈터’ ‘침묵의 의미’ 등 4개의 주제로 구성된 53편의 글에서 가족과 이웃의 소중함, 대화의 중요성, 행복의 의미, 새롭게 인생을 바라보게 된 경험과 만남을 수많은 예화를 통해 들려준다.

“노동을 해서 얻은 돈으로 읽고 싶었던 책들을 한아름 사 들고 서점 문을 나왔을 때 눈부셨던 대낮의 햇빛,/…/곰팡내 나는 수십만 권의 책들이 꽂혀 있는 대학 도서관 서가를 지나는 순간 가난했지만 학문을 하겠다는 욕망을 불태웠을 때,/…/이 모든 것 또한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행복의 순간이다.”

그는 가난하고 힘들었던 유학시절, 책을 쓰거나 번역하면서 젊음을 불태웠던 일 등 행복했던 순간을 잔잔하게 기록한다. 고서, 램프, 시계 등을 수집하는 취미 등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따뜻하게 묘사한다.

“저문 강가에 이르러 조용히 되돌아보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축복받은 행복의 조각 같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보다 기억 속에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동의할 수 있는 정신적 만족도임을 역설한다. 이 교수는 문학, 음악, 미술의 아름다움에서부터 삶의 미학까지 두루 관조한다. “인생이 신비로움 속을 탐색하는 여행이라면, 고흐가 화폭 위에 새로이 창조한 신비로움은 삶의 진폭을 그만큼 더 넓힌 미학적 공간과도 같은 것”이라고 평한 뒤 “인간이 처해 있는 실존적인 상황은 그 누구에게나 비극적이지만 누구나 ‘인간의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웃음을 보일 수 있다”고 말한다.

여름의 풍요로움과 겨울 속의 봄, ‘시간의 빈터’처럼 느껴지는 12월의 슬픔 등 계절의 변화에 따른 단상을 섬세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담아낸 글들도 눈길을 붙든다. 사라져 가는 간이역, 기와집, 종소리 등 잊혀져가는 추억에 대한 아쉬움과 유년시절의 기억들도 되새긴다. 침묵이 공포스러웠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고 말보다 더 깊고 무거운 의미를 지닌 침묵의 신비에 대해 얘기한다. 그는 “침묵과 정적을 죽음과 같다고 무서워했지만, 그 시간이 없었으면 사색의 깊은 샘을 팔 수도 없었고, 아무런 창조적인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노교수가 삶 속에서 길어 올린 지혜와 성찰의 글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준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