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는 '경영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평생 30여권의 책을 쓴 저술가로 명성을 날린 그는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으로 '지식노동자' '아웃소싱' '민영화'라는 조어를 만들어냈다. 이른바 '웰치 혁명'의 방향설정자로도 활약했다.

드러커는 71세 때인 1981년 잭 웰치 GE 최고경영자의 컨설팅을 맡았고 '시장점유율이 1위 혹은 2위 이외의 사업에서는 손을 뗀다'는 경영 방침을 만들어냈다. '지식사회'의 도래를 예언하는 등 그가 남긴 유산은 경영학을 뛰어넘고 있다. 무엇이 드러커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드러커에게는 바로 관계지향적 성향을 지닌 부모가 있었다. "나는 부모님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접할 수 있었다. 내게 그 경험은 실질적인 교육이 되었다. "

관계지향성을 가진 사람은 목표지향성을 지닌 사람과 달리 다른 사람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기꺼이 돕고 헌신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드러커는 어린 시절 부모의 관계지향성 덕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토마스 만,조지프 슘페터와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등 당대의 유명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유명인을 만날 때마다 아버지는 그에게 꼭 악수를 하게 했다. 아홉 살 때 프로이트를 만난 그는 평생 그때의 장면을 기억했다.

아버지의 관계지향성은 후일 그가 웰치,모리타 아키오 등 경영인뿐만 아니라 칼 폴라니,마셜 맥루언 등 수많은 대가들과 교분을 나누는 데 영향을 끼쳤다.

경제학자였던 아버지 아돌프 드러커는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외국무역성 장관을 지냈다. 1916년 6월19일 당시 프란츠 요제프 황제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으면서 명문가의 탄생을 알렸다.

아버지는 관계지향적인 집안을 당대의 수많은 인사들이 드나드는 '살롱'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경주 최부잣집의 사랑방처럼 수많은 인사들이 집에 드나들었다. 월요일에는 아버지 주최로 '정치의 밤'이 열려 정치가나 학자 · 은행가 · 지식인이 모였고,수요일에는 어머니 주최로 '의학과 정신분석의 밤'이 열렸다.

이때 슘페터나 하이에크 같은 경제학자와 초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 된 토마시 마사리크도 방문했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당시 빈의 유명 여배우인 마리아 뮐러가 방문해 괴테의 작품을 낭독해 주기도 했다.

드러커는 또 부모의 친구들이 개최한 살롱파티에도 자주 갔다. 열여섯 살 때 그곳에서 토마스 만을 만났다. 드러커의 부모는 자녀들을 홈파티와 살롱파티에 참석할 수 있게 했는데 다만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드러커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방문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상이한 사람들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부친의 관계지향성은 1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 오스트리아 경제학파가 뿌리내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아버지는 경제학자이기도 했지만 젊은 경제학자들을 채용해 육성하는 대부 같은 분이셨다. " 드러커의 회고처럼 아버지는 슘페터의 후원자가 됐는데 후일 그는 '창조적 파괴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명제로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가 됐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 · 자녀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