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50세가 될 때까지 늘 '돈에 배고픈 부자'였다. 어떤 돈벌이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빼고는 웃지도 않았다. 돈을 벌었을 때는 모자를 내던지며 의기양양했지만 손해를 보았을 때는 금방 병이 나곤 했다.

한번은 가격이 4만달러나 되는 곡물을 5대호로 경유해 실어 나르게 되었는데,150달러가 아까워 보험에 들지 않았다. 그날 밤 폭풍이 엄습했다. 그는 짐을 잃어버리지나 않았을까 몹시 번민했다. 다음날 아침에 급히 보험에 들었다. 그런데 아무 피해 없이 짐이 무사히 목적지에 닿았다는 전보가 왔다. 그는 150달러가 보험료로 낭비된 것이 아까워 언짢다며 집으로 돌아가 몸져누웠다.

황금이 축적될수록 그는 황금이 주는 번민으로 불면에 시달렸다. 마침내 의사는 "돈이든 번민이든 생명이든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은퇴하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사는 그에게 돈으로 인한 번민을 피할 것,편안히 쉴 것,조금 더 먹고 싶을 때 그만둘 것 등 세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그는 이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골프도 배우고 이웃과 잡담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마쯤 돈을 벌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돈이 사람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꽉 움켜쥐고 있던 돈을 사회를 위해 조금씩 내놓자 어쩐 일인지 뿌듯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번민하지 않았고 잠도 잘 잤다. 50대 초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그는 무려 98세까지 살았다.

그는 '석유왕'으로 불린 존 D 록펠러다. 록펠러는 30세 때 100만달러를 가진 부자였고 40세 때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창립해 50세 때 이미 세계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올랐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대한 경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록펠러의 경우 재력이나 권력의 정상에 오른 인간이 빠질 수 있는 오만,즉 '휴브리스 요인(hubris factor)'에 대한 경계를 배울 수 있다. 휴브리스는 아널드 토인비에 의해 정립된 개념으로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능력만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 과거에 했던 방식대로 일을 밀어붙이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의 부질없는 오만을 일컫는다.

이는 또 그리스 · 로마 시대의 비극에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이르기까지 주인공들이 보이는 가장 낯익은 테마이기도 하다.

록펠러는 스크루지처럼 지독히도 인색하게 살다 기부에 눈을 뜨면서 인생의 대전환기를 맞았다. 그것은 일종의 각성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삶은 '휴브리스'로 인한 파멸 직전에 극적으로 구원받았다. 독점체제를 구축한 냉혹한 자본가이지만 자선사업가로 변신해 가진 돈을 아름답게 썼다.

그는 51세 때인 1890년 시카고대에 4억1000만달러를 기부한 것을 비롯해 세계 최대 규모의 록펠러재단과 록펠러의학연구소 등을 설립해 자선가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했다. 오늘날 미국 '슈퍼리치'들의 기부문화는 바로 록펠러에서 시작된 것이다.

록펠러의 변신은 그가 기부한 액수보다 더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재산 축적에 열중하다 건강을 잃고서야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준 록펠러의 극적인 삶은 진정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록펠러센터는 전 세계인이 꼭 들르는 명소가 됐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 · 자녀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