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철학적 빈곤으로서의 공생발전론
이번에는 공생발전(共生發展)이다. 대통령이 30대 대기업 회장을 불러 직접 강의를 베풀 예정이라 하니 궁금증도 기대도 크다. 정권 후반기라고 해서 새로운 아젠다를 던지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주제가 너무 크다. 실사구시형의 대통령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공생발전론은 대형 담론을 좋아하는 참모의 작품일 것이다. 대통령을 철학자로까지 밀어올리고 싶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측근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감히 작은 지식을 큰 지식처럼 포장해보려는 만용이다. 그러나 오류로 점철된 한물간 논변이다.

대통령의 8 · 15 경축사가 시장경제의 진화를 언급하기 시작할 때 충분히 그 다음의 전개를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 사이비 진화론자들은 오랜 진화 과정에서 무언가의 법칙을 추론한 다음 그 법칙을 미래로 연장하려는 설계주의적 시도를 감행하게 된다. 허버트 스펜서가 그랬고 프랜시스 골턴에서 더욱 심각해졌다. 우리는 그런 종류의 사회공학적 진화론을 잘 알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 진화에서 사회 진화를 설명하는 논리로 재해석되면서 불행의 씨앗을 뿌렸다.

스펜서는 가난한 계층과 민족은 생물학적으로 덜 진화된 것으로 보고 사회 개량가들이 진화의 과정에 개입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인이 아닌 민족들은 원숭이 단계로 치부되었고 백인이 후진 사회에 개입해 진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19세기 말의 대 혼돈을 낳았다. 다윈의 사촌이기도 했던 골턴은 한걸음 더 나갔다. 덜 진화한 사람의 번식을 막고 우수한 사람의 생식을 지원함으로써 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소위 우생학이 그의 작품이다. 이 이론은 실제로 캐나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그리고 미국의 많은 주들에서 가난한 자와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강제 불임시술을 정당화했다. 급기야 나치의 유대인 절멸론으로 발전했다. 희대의 참극은 이렇게 사이비 진화론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점(占)도 유사한 논리구조를 갖고 있다. 대부분 점쟁이는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정말 잘 맞힌다. 그러나 한치 앞도 알지 못한다. 소위 기술적 주가 분석이라는 것도 그런 범주다. 지나간 차트는 주가 움직임의 필연성을 완벽하게 설명하지만 앞날의 주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진화에 대한 '사실의 추론'으로부터 미래사회의 청사진을 얻는다는 '당위의 추론'은 결코 도출되지 않는다.

시장경제가 이런 방식으로 진화해왔으므로 앞으로는 공생발전으로 나가자는 식의 논리는 초기 진화론자들의 어설픈 사회공학을 재연해보자는 허망한 논리다. 그것이 아니라면 경쟁 아닌 협동을 진화 전략으로 해석한 크로포트킨 류의 이론에 속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무너질 것(사실)이므로 무너뜨리자(당위)는 논리 비약의 공산주의 혁명 이데올로기는 그런 오류의 대미였다. 이타적 인간들의 순수한 협동체제가 근대화 초입의 국가들을 어떤 참담한 지경으로 몰아갔는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다.

공생으로 따지자면 시장경제야말로 공생발전의 체제다. 세계의 수십억 개인과 수천만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거래하고 교환하는 이 거대한 시장시스템을 대체할 만한 다른 공생 시스템은 없다. 생태계에서도 가장 풍부한 다양성을 갖는다는 정글은,정글의 법칙이라는 말이 우습게도 바로 청와대가 말하는 공생과 협력으로 그 풍성함을 유지한다. 우리는 인류가 만들어낸 자생적 질서인 시장경제의 강점을 강조하기 위해 청와대가 굳이 공생발전이라는 단어를 꺼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장에 개입하는 사회공학이며 우생학에 가까울 것이다.

이미 소위 동반성장론이 지금 우리경제를 조합주의 사회로 만들고 있다. 이 사회의 경제 생태계는 필연적으로 열린 정글이 아닌 식물원으로 전락하게 된다. 경쟁 없는 협동의 다른 말이 부패요 기득권이다. 열린 경쟁만이 진정한 협동을 만들어 내고 우리는 그 결과를 공생이라고 부른다. 시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지금 시장의 진화를 말하고 있다.

정규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