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멕시코 순회공연 때였어요. 살리나스라는 작은 도시에 갔는데 예전에 바다였던 곳이라 소금으로 먹고사는 곳이었습니다. 다운타운이 서울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 정도밖에 안 돼요. 그런데 극장은 정반대예요. 고풍스러운 건물에 고흐 그림도 걸려 있고.도시 모습하고 정반대였죠.관객이 오겠나 싶었는데 맙소사 저녁 때 극장이 터져나가도록 몰려와서는 기립박수를 쳤어요. 시장님은 우리에게 소금으로 만든 십자가를 선물하고…."

한국현대무용가 1세대인 김복희 한양대 교수(한국무용협회 이사장 · 63).그는 "그 순간 평생 무용하기를 참 잘했다 싶었다"며 "그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데뷔 40년을 맞은 그는 지난 2월 '김복희 무대만들기 40년' 공연 때에도 이런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다섯살 때부터 무용을 배웠으니 56년째 이어온 무용 인생이지만 처녀작 '법열의 시'를 발표하던 1971년의 한국 상황은 황무지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무용단을 창단한 게 23세 때였으니까 어린 나이에 좀 당돌한 편이었죠.그 땐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어 힘든 줄 몰랐어요. 꾸지람도 많이 듣고 그랬죠.40주년 공연에 4개 작품을 올렸는데 1990년대와 2000년대 각각 2편씩이었습니다. 저를 돌아보는 자리이기도 했죠."

이화여대 무용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대학 동료였던 김화숙 원광대 교수와 함께 1971년 김복희 · 김화숙무용단을 창단,그해 명동예술극장에서 첫 공연을 열었다. 1991년부터 '김복희 무용단'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지금까지 70여편의 작품을 창작했다.

오는 16~17일에는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국수호 이정희 김매자 씨와 함께 '명작전'을 펼친다. 그는 이 무대에 서정주 시인의 '신부(新婦)'를 올린다. 시집 《질마재 신화(神話)》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시는 혼인 첫날밤에 생긴 오해로 신부가 평생을 그대로 앉아 있다 먼 훗날 신랑의 손길이 닿자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았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첫날밤 신랑이 오줌 누러 나가다가 돌쩌귀에 옷이 걸렸는데 그걸 모르고 이렇게 음탕한 여자는 안되겠다 싶어 떠나버리잖아요. 여자는 기다리다 한 줌 재가 된다는 것.그 신부 속에는 우리나라 옛날 여인들의 한(恨) 같은 게 있지요. 그 스토리에 우리네 정신의 한 축을 투영해내는 거죠.시 속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뽑아내는 겁니다. "

그는 이전에도 시를 모티브로 작업을 많이 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도 무용으로 옮겼다. "절에 가면 바루공양이라고 해서 밥그릇 4개 쌓아놓고 공양하죠.춤은 공간이 넓어야 출 수 있다는 게 상식이지만 저는 얼마나 좁은 공간에서도 가능할까 실험해봤습니다. 천을 펼쳐 정사각형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서 춤을 추고는 마지막에 딱 접는 걸로 했죠.그때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음악을 썼는데 정말 좋았어요. "

그는 "무용이야말로 시,그것도 몸으로 쓰는 시"라고 말했다. 시적인 메타포를 갖고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진짜 시를 붙이면 관객이 친밀하게 다가오고 무용 대중화도 저절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처음 무대에 올린 시는 무용평론가로도 유명한 작고 시인 김영태 씨의 '덫'(1978)이었다. 이후 신석초 김종삼 신경림 이형기 김소월 등 많은 시인들의 작품으로 무대를 달궜다. 스페인 공연 때 마드리드 전역의 지하철 벽면을 포스터로 장식했던 작품도 신경림 시인의 '우리 시대의 새'였다.

그는 요즘 현대무용이 점점 난해해진다며 관객들이 접근하기 쉬우면서도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용이 대중화돼야 한다고 하는데 순수를 지키면서 대중화하는 게 뭘까 생각했어요. 많이 알려진 시를 접목하면 관객이 이해하기 쉽잖아요. 현대무용에서는 몸보다 마음의 소리가 더 중요하니까 그런 느낌을 응축적으로 담아내는 거죠.이는 섬세한 움직임으로 표현하는데 정형화된 발레와 달리 자유로운 형식으로 하려고 하지요. 이사도라 던컨이 맨발로 뛰어나왔듯이 자신 속의 소리를 어떻게 표출해내느냐 하는 몸짓,그게 중요합니다. 그런 몸을 만들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하고 유연성과 파워를 키우지요. "

그는 하루 8시간씩 훈련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훈련이 안 되면 힘이 안 생겨요. 현대무용은 움직임의 폭을 넓히기 위해 '아웃'만 쓰는 게 아니라 '인' 방식도 써요. 안짱다리처럼 해서 춤을 추기도 하고.타성에 젖으면 늘 쓰던 근육에 감각이 없어져요. 다른 근육 훈련을 병행해야 몸의 균형이 잡힙니다. "

이처럼 혹독하게 연습하고도 '공연할수록 손해'인 무용을 왜 하는 걸까. "아직 관객층도 두텁지 않고,표 파는 건 빤하고,공들여 만든 무대세트도 한번 쓴 뒤에 없애고,그야말로 '소모의 예술'이죠.1회성에 그치잖아요. 무대에서 희열을 느끼지 못한다면 중노동일 뿐입니다. 몸도 힘들고 돈도 안 되지만 그래도 좋으니 어쩌겠어요. 관객의 박수갈채에 새로운 희열을 느끼고 또 연습 무대에 오르고 그러는 거지요. 다행히 올해 국립현대무용단 창단공연이 매진된 걸 보면 전망이 어둡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

그가 무용에 빠진 것은 대구 효성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였다. "2년 동안 무용 선생님께 배우고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저희 옆집에 사는 한국무용 선생님께 배웠어요. 그런 분들이 우연히 옆에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연유도 있긴 합니다. 이종사촌 언니가 우리나라 초창기의 유명한 무용가(조용자)였어요.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엄마는 그 언니의 춤이 좋았던지 저를 지원해주셨죠."

고등학교 1학년 때 호세 리몽의 내한 공연을 보고는 '너무나 큰 감동'에 사로잡혀 평생의 꿈을 확정했다고 했다. "그땐 현대무용이라는 장르가 분명하게 있지도 않았어요. 발레하는 사람들이 창작 무용을 일본식으로 몇 번 하는 것만 있었고 현대무용의 기본이 있던 시기도 아니었는데,무용수들이 전부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장면에 팍 꽂혔죠.지금도 눈에 선해요. 원으로 자유와 평화 이런 걸 형상화했던 기억이 나요. 나도 무용을 끝까지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확실히 했습니다. "

그때 이후 그의 몸무게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2~3㎏ 안에서 왔다갔다했다. 그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하다는 얘기다. 그가 부러워하는 건 해외 공연 길에서 만나는 문화예술적 분위기다.

"1977년에 파리에서 처음 공연했고 1982년 미국 LA에서 무용단 공연,2년 뒤 다시 프랑스 순회공연 등 셀 수도 없이 다녔죠.민간무용단으로는 가장 많은 해외공연 기록을 갖고 있을 거예요. 우리나라와 달리 무용을 아무 데서나 즐기고 아무 데서나 공연할 정도로 생활화된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남미도 마찬가지였죠.일본 갔을 땐 왕세자비가 공연을 보러 왔더군요. 왕세자는 몇 년 전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무용을 워낙 좋아해서 콩쿠르를 만들고 공연할 때마다 나타났다고 해요. 그날 흰 옷을 곱게 차려입은 부인이 행사에 왔는데 예술에 관한 안목도 높고 불어 영어도 잘하고,참으로 멋있었어요. "

해외 공연 다니면서 고생한 일도 많았을 법하다. "외국 나갈 기회가 별로 없던 때였잖아요. 해외 나가면 음식 문제로 고생하는 단원들이 있었죠.반대로 현지 음식 잘 먹는 단원도 있는데 그런 친구들에게 더 먹으라고 모차렐라 치즈 떼어주다가 치즈가 주욱 늘어지는 바람에 대사관 사람들한테 민망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보다 더한 건 참,무용단원들끼리 싸워서 뼈가 다 부러지고 난리난 적이 있었어요. 글쎄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웃음)"

만난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