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의 낙(樂)중 하나는 '빨간 날'이다. 주말을 포함해 3일 연휴라도 있는 달이면 날아갈 것 같다. 반대로 모처럼의 빨간 날이 주말과 겹치면 힘이 쭉 빠지고 만다.

'가정의 달'인 5월만은 예외다. 어린이날,어버이날,스승의 날이 연달아 끼어 있다. 아내 생일도 5월이다.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다. 평소 모아뒀던 비자금까지 털어야 한다. 물론 보람은 상당하다. 좋아하는 아이들이나 즐거워하시는 부모님을 보면 또다른 기쁨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35살 김 과장은 '낀 세대'다. 아이들을 위해,부모님을 위해 '봉사'만 해야 하는 세대다. 아이들이 어려서 카네이션을 받는 기쁨도 아직 느낄 수 없다. 평소 '일보다 가정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김 과장이지만,가정의 달 5월이 달갑지만은 않은 이유다.

◆더욱 얇게만 느껴지는 월급봉투

국내 대기업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이모 과장(35)은 지난 6,7일 휴가를 내기 위해 눈치를 봤다. 이 과장에게 매년 5월5일에서 9일까지는 '가정의 빅 이벤트기간'이다. 어린이날 다음 날인 6일은 어머니 생신이다. 어버이날을 지내면 9일이 결혼기념일이다. 올해의 경우 6,7일 휴가를 내면 모처럼 가족들과 여행을 갈 기회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눈치를 봤지만 휴가의 '휴'자도 꺼내지 못했다. 팀원 모두가 휴일도 반납하고 야근을 밥먹듯 하는 시기였다. 결혼 5주년을 맞은 부인이 닦달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이 과장의 결론은 돈으로 때우자는 것.짬을 내 백화점에 들렀다. 아이가 사달라는 장난감 로봇 값은 10만원을 훌쩍 넘었다. 괜찮다 싶은 결혼기념일 선물도 수십만원은 줘야 했다. 부모님 선물값까지 감안하면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은 카드에 의지해야 했다. 아이와 부모님,아내의 선물까지 구입하니 허리가 휘청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카드값 걱정은 잠시 잊었다. 이 과장은 "내년에 꼭 결혼기념 여행을 가자고 아내를 달랜 뒤 9일 부모님을 모시고 야외에 다녀오는 것으로 '대사(大事)'를 넘겼다"며 "가족들끼리 모이는 것은 좋지만 금전적 부담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가정을 돌볼 시간을 달라"

통신회사에 근무하는 주모 과장(37 · 여)은 맞벌이 부부다. 세 살 연상인 그의 남편 역시 같은 회사에 근무한다. 주 과장 부부는 매년 어린이날만 되면 6살 난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증폭된다. 부부는 평소 잦은 야근 때문에 퇴근이 늦다. 아이와 충분히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어린이날만이라도 하루 종일 놀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업무 특성상 거의 매년 출근해야 하는 신세다.

주 과장 부부가 고육지책으로 마련한 대안은 어린이날에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는 것.작년엔 남편이 아이를 맡았다. 지난 5일엔 주 과장이 아이와 함께 출근했다.

국토해양부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40)은 업무 특성상 1년에 10여 차례 해외 출장을 간다. 그러다 보니 가정의 각종 경조사를 본의 아니게 못 챙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김 과장은 지난 4일부터 아프리카로 출장을 갔다. 문제는 3일은 첫째아들 생일,5일은 어린이날,8일은 어버이날,10일은 둘째아들 생일이란 점이었다. 김 과장은 "작년 이맘 때도 해외 출장때문에 가정 대소사를 하나도 못 챙겼는데 올해는 그나마 간신히 첫째아들 생일은 챙겨서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가정불화 불씨가 되기도

역설적으로 '가정의 달'이 잠복해 있던 가정 불화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맞벌이 커리어우먼 유모씨(32)에게 5월은 어버이날과 시어머니 생신이 있는 부담스러운 달이다. 그녀나 남편이나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편이라 친정부모,시부모를 위한 선물을 구입하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5년 전 사고로 시아버지를 잃고 홀로 된 시어머니에 대한 남편의 애정이 지나치게 각별하다는 점이다. 유씨가 모자간의 끈끈한 정을 훼방놓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 전부터 "우리 엄마한테 잘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결혼 후에는 시어머니 생신이나 어버이날이 있는 주말에는 주말을 통째로 시어머니 댁에서 지내길 요구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몇 주 전부터 "이번에는 어버이날이 주말이니 아예 금요일날 시골에 내려가자"는 남편의 말에 유씨는 폭발하고 말았다. 어버이날 오전에라도 친정에 들르고 싶은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남편이 못내 서운했기 때문이다. 몸이 아픈 친정어머니를 위해 보약이라도 지을라치면 "우리 엄마는…"이라고 되묻는 남편에 대한 원한이 쌓인 탓도 컸다. 결국 부부싸움을 했다. 유씨는 "3년을 참아왔으니 이번에는 며칠 더 각방을 쓰더라도 이 문제를 매듭지을 생각"이라며 자존심 싸움을 이어갈 태세를 보였다.

◆노총각 · 노처녀도 피해갈 수 없다

노총각,노처녀들도 '가정의 달'에서 자유롭지 않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더욱 커지는가 하면,"빨리 결혼하라"는 부모들의 성화가 극에 달하는 때가 바로 5월이기 때문이다.

노총각 은행원인 오 대리(36)에게 올해 5월 초는 더욱 쓸쓸하다. '싱글 단짝'을 자처하던 친구마저 지난달 장가를 갔기 때문이다. 5월에는 친구들이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늘리다보니 오 대리는 '왕따'가 됐다. 오 대리는 "작년까지만 해도 어린이날,석가탄신일 등의 휴일을 이용해 여가를 같이 즐길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제 혼자 남았다"며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라도 소개팅이나 선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골드미스'를 자처하는 변호사 박모씨(37)는 해마다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고향집에 내려 갈 것인가,말 것인가를 놓고 고심을 거듭한다. 박씨는 연봉이 2억원에 달하는 고액 연봉자다. 딸린 가족도 없어 매년 어버이날만 되면 부모님께 고액의 선물을 안겨 드린다. 지난해에는 부모님 두 분을 하와이로 보내 드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의 반응은 한결같다. "자식이 부모님께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는 손자 손녀를 안겨드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평소에 결혼 문제에 대해 포기하는 듯했던 부모님들도 5월만 되면 다시 결혼하라고 성화를 부려 집에 내려가기가 꺼려진다"고 털어놨다.

김동윤/이정호/이고운/이상은 기자 oasis9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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