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미국 오리건주에 연수갔을 때 일이다. 금요일 저녁마다 가족끼리 만나는 미국인 친구 라스(Ross)가 있었다. 한국의 아이를 입양한 그 친구는 한국 풍습에 관해 호기심이 많았다. 예를 들면 입양한 아이의 기록에 'pig belt'(한국의 홀트아동복지재단에서 이렇게 적었음)라고 돼 있는데 뭐냐고 필자에게 물어보면 12간지(干支)를 설명하면서 '돼지띠'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미국인 친구가 한 시간이나 설명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 시스템이 있었다. 바로 전세제도다. 필자는 영어로 long term house rental system과 deposit rental system이란 표현을 써가며 열심히 설명했지만 "왜 집주인이 만기에 원금 그대로를 세입자에게 돌려주나? 집주인이 손해 보는 것 아닌가?"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연 5% 아래의 저금리와 집값 안정기조에 익숙했던 미국인으로선 한국의 집주인들이 전세금을 활용해 가격이 뛰는 부동산을 사거나 고금리 금융상품에 투자,돈을 버는 자본이득(capital gain)행위를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미국 등 외국에는 월세로 살거나 집을 할부로 사는 경우는 있어도 우리나라와 같은 전세제도는 없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은행에 돈을 넣어봤자 세금까지 떼고 내면 연 5%의 수익률을 얻기가 힘들어졌으니 전세를 준 주인이 직장에서 은퇴했다면 월세로 돌리는 편이 속이 편할 수 있다.

전셋값도 집값과 마찬가지로 주택수급,인구 및 교육수요,통화량과 금리 등에 따라 결정된다. 요즘 벌어지는 강남과 목동 등의 전세난은 고교선택제 축소에 따른 맹모(孟母) 행렬 요인이 크다. 이미 살던 세입자도 집주인한테 "1억원 정도는 올려주셔야죠"라고 독촉받는 바람에 한숨을 푹푹 쉬고 있다. 잠실에선 2년 전 공급물량이 한꺼번에 넘쳐 전세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는 '역전세난'이 벌어졌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작년에는 서울 강북에서 뉴타운 개발로 연립주택이 대거 철거돼 서민들이 전세집을 찾아 헤매면서 동북권의 노 · 도 · 강(노원구 도봉구 강북구)은 물론 경기도의 의정부 양주 등에서 전셋값과 집값이 폭등했었다.

2008년 현재 우리나라 자가보유율은 56.39%.선진국인 미국 68% 일본 61%(2003년 기준)보다 낮다. 10가구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전세나 사글세,공공임대주택에 산다. 서울시가 20년 장기전세주택(시프트)을 공급하고 있지만 수요에 비해 턱 없다.

정부가 전세대책을 가끔 내놓지만 주택공급을 꾸준히 늘리는 수밖에 뾰족한 방법이 없다. 일각에선 세입자의 급작스런 부담을 줄이기 위해 기존 월세나 전세보증금의 인상률을 5%가 넘지 못하도록 하는 전월세상한제의 법제화를 추진 중이지만 시장경제 원리에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되풀이되는 학군발 전세대란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려면 주택임대차보호법상 규정된 전세보장 기간을 현행 2년에서 중 · 고교 학년제에 맞춰 3년으로 늘리는 건 어떨까. 인상분을 미리 받으려는 집주인 때문에 전셋값 급등을 걱정하나,1989년 전세보장 기간이 1년에서 2년으로 늘었을 때 잠깐 급등했다가 다시 안정된 적이 있다.

정구학 건설부동산부장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