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예술의 융합,예술의 월경(越境)을 이야기하지만,막상 그 수준이 낮은 게 현실이에요. 두 장르를 비스듬하게 나란히 세워둔 정도라는 표현이 맞겠지요. 다른 예술 장르끼리 만났으면 새로운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어내야죠."(소설가 김탁환)

"물 분자의 화학식이 H2O잖아요?수소와 산소라는 상이한 물질이 합쳐져서 물이라는 새로운 것이 생겼죠.우리 작업도 비슷해요. 떨어져 있을 때에도 극단적이었던 두 장르가 만나 더 극단적인 게 나올 수 있어요. 우리가 함께 만든 결과물의 제목이 '99'입니다. 한자리 숫자인 '9' 둘이 만나 '99'라는 차원이 다른 두자리 숫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진 작가 강영호)

소설가 김탁환씨(42)는 《불멸의 이순신》 《방각본 살인사건》 등 '백탑파 시리즈',《리심》 《노서아 가비》 등 역사소설뿐 아니라 SF 등으로 활발하게 글쓰기의 영역을 넓혀가는 작가다. 강영호씨(40)는 '인터뷰''질투는 나의 힘' 등 영화 포스터,광고화보 등을 촬영했던 유명 사진 작가다. 특별한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지난해 김씨의 책 《천년습작》의 표지 촬영 때.이렇게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바로 의기투합해 새롭고 독특한 프로젝트를 모색하게 됐다.

계기는 강씨의 사진이었다. 강씨의 작품을 본 김씨의 머리 속에는 온갖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김씨가 글을 쓰고 강씨가 사진 작업을 하는 '병렬적'이고 '분업적'인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건 아니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서로의 역량과 발상을 나누고 보탰다. 김씨는 강씨가 창조한 여러 이미지 가운데 일부를 선택했고,강씨도 김씨가 쓴 글을 읽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들은 이 과정을 '딱히 정해진 순서도 없고,원인과 결과도 불분명하며,두 사람의 현실과 상상이 마치 점액질의 물질처럼 뒤엉켜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 결과물이 지난해 11월 출간된 책 《99》(살림)이다. 이 책은 '김탁환 글,강영호 사진'이 아닌 '김탁환 · 강영호 장편연작소설'이라는 간판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서울 홍익대 앞 상상사진관을 찾아오는 손님들의 기이한 사연을 묶은 이 책은 사진과 글이 샴쌍둥이처럼 딱 들러붙어 있는 느낌이다. 두 사람은 지금도 인터넷 교보문고 사이트에 후속편을 연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함께 작업할 예정이다.

강씨는 자신을 '이미지 텔러'로,김씨는 '스토리 디자이너'라고 소개했지만,개성 강한 예술가들이 장르를 넘어서며 함께 작업한다는 게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예술가적 기질이라는 공통분모가 화학적 작용을 일으키기 쉽다고 반론했다. 김씨는 "예술가들은 감정의 주파수를 높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유사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강씨도 "춤을 추며 사진을 촬영하는 내 방식에 대해 흔히 '회오리같다'고들 하며 구경하기는 좋아하지만 감히 들어오지는 못한다"면서 "그런데 김 선생님은 감수성의 '맷집'이 좋아서인지 내가 일으키는 회오리 안에 뛰어들어올 수 있더라"고 평가했다.

상이한 서로의 방식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거둔 수확이다. 강씨는 "내가 '엉망진창'으로 이미지를 끌어내 던지면 김 선생님이 '청소'를 깔끔하게 해서 글을 보내더라"고 감탄했다. 김씨는 "보통 '글쟁이'들은 뒤로 빠져 뇌로 사색하고 관망하는 경우가 태반인데,육체적 · 감각적으로 일하는 강 작가의 방식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다른 장르의 예술이 만날 때 벌어지는 현상을 단순히 '시너지 효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강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로 화끈하게 불을 지르며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란다. 또한 예술이 경계를 넘어 부딪칠 때 어떤 장단점이 있을지 분석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했다. 과정을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는 게 이들의 지론이다.

"우리는 통섭(統攝)을 그냥 놀면서 몸으로 실천했어요. 그 덕분에 '사진이 사진다워야지,문학이 문학다워야지'라는 시선에 맞설 수 있는 용기나 객기가 생겼어요. 앞으로 장르로 예술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장르를 뒤섞는 행위 자체를 예술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강)

"그냥 재미있고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을 뿐이었어요. 특정한 롤모델에 구애받지 않고 맘껏 가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다루는 능력을 실컷 발휘하다 보면 뭐가 돼도 되겠죠.일단 우리의 작업은 책으로 나왔지만 앞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구현될 수도 있겠죠."(김)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