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이라고 마음대로 법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설익은 아이디어로 방망이 땅땅 두드린다면 오히려 공해요 법 정신의 훼손이며 그 법에 복종해야 할 국민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판사 출신인 모 국회의원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법에 따라 근엄하게도 판사직무를 수행해왔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논의하고 있는 한은법 개정 문제도 그렇게 될 공산이 크다. 한 마디로 한은법은 국회의원 몇 명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화폐가치를 어떻게 유지하고 지킬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나라경제를 어떤 의사결정 프로세스 위에 놓을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다.

한은법 제1조 목적조항을 바꾸는 것이 단순히 한은의 업무수행 절차를 고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물가안정만을 규정할 것인지,'금융안정 기능'을 명기할 것인지는 중앙은행의 본질에 관한 합의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미국의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물가 외에 고용을 동시에 고려하도록 한 것을 참고로 한다는 모양이지만 FRB의 이 조항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물가도 안정시키고 성장도 추구하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 조항은 물가와 성장,다시 말해 물가와 실업률은 정확하게 모순 상충의 관계에 있다는 고백이며 이 모순을 다루기 위해 정치 포퓰리즘으로부터(정부가 아니다) 독립적인 기구로서의 중앙은행을 창설할 수밖에 없다는 선언이다. 지금 우리 한은법이 '물가'만 규정하고 있는 것은 한은법 3조의 '한은의 중립'을 보장하는 지배구조의 논리적 원천이다. 만일 이 조항을 손대게 되면 한은의 지배구조 전체를 '행정부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행정부 내 중립'이라는 형태로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도의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다시 말해 외부의 소위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물가'라는 엄혹한 내부의 잣대를 둔다는 것이 제1조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1조를 바꾸면 헌법 체계 전부를 손질해야 하지 않겠는가.

논란이 많았던 금융 기관 감독권도 그런 경우다. 인허가권을 포함한 포괄적 감독권은 어느 나라에서건 정부 권한이다. 아니 그런 기능을 하는 곳을 정부라고 부른다. 한은은 어떤 법률에 의해서도,위임행위에 의해서도,그리고 의사결정 구조에 있어서도 국민에게 책임지는 절차를 갖고 있지 않다. 한은 총재가 선거로 선출되는 것도 아니다. 만일 한은이 감독권을 갖게 된다면 다른 행정부서처럼 재정부의 구체적인 예산 통제를 받고 정부의 인사 지휘를 받아야 한다. 청와대 회의에 매주 참여하고 정부의 금리 협의를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중앙은행이 적극적으로 금융시스템 안정에 나서도록 법을 고친 영국이 중앙은행 이사회 의장을 재무장관이 지명하도록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앙은행 총재는 금리결정 외에는 재무장관의 직 · 간접의 지휘를 받는 것이다. 한은은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중립 아닌 독립을, 그것도 '한은 공화국'을 추구한다는 지적까지 받았던 한은법 투쟁의 역사 아니었던가.

물론 조사권은 경우가 다르다. 한은은 당연히 공동조사 혹은 정보 공유의 채널을 가져야 마땅하다. 금융 감독은 금감원으로 일원화하되 감독 정보는 기획재정부나 금융위 한국은행이 온전히 공유하는 것이 맞다. "정보를 달라"는 한은의 요청에 금감원이 보도자료나 던져준다면 이게 될 말인가. 각 기관이 중복 감독할 이유도 없고 감독원이 금융정보를 온전히 자기의 소유물인 것처럼 독점해야 할 까닭도 없다. 감독권을 빌미로 금융기관 감사 자리나 차지하겠다는 발상이 아니라면 감독 정보는 온전히 공유해야 한다.

경제위기 시대에 국회가 한은법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주제의 중요성에 따라 공론화의 수준도 달라진다. 한은법은 다시 논의할 것을 주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