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마켓펀드(MMF)에 넣어두고 조금씩 꺼내 써야지…주식에 '몰빵'해봤자 몇 배 불리기도 어렵고,그렇다고 요즘 같은 불경기에 2~3년 전처럼 명품 쇼핑하는 데 쓸 수는 없잖아요. "

지난 20일 서울 강남의 한 프라이빗 뱅킹(PB)센터에서 만난 60대 중반의 한 고객은 최근 자신의 예금계좌로 들어온 1000만원의 종합부동산세 환급금을 MMF 통장으로 이체시키면서 이같이 말했다.

165㎡짜리 대치동 아파트에서 1980년대 초반부터 살고 있다는 이 고객은 "강만수 장관이 대치동 선경아파트 163㎡짜리에 입주 때부터 살았다던데,그 사람은 아마 1000만원 안팎 종부세 환급금을 받았을 것"이라며 "그 사람은 종부세 환급받으면 좋은 일 하는 데 쓴다고 했는데,나야 불우이웃 돕기까지는 못하더라도 흥청망청 쓸 수는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1월 한 달 동안 총 3000억원 규모의 종부세 환급금이 지난해 종부세를 낸 35만여명의 부동산 부자들에게 풀린 지 20여일이 지났지만 이 돈이 전혀 시장에 돌지 않고 있다. 지급된 금액이 부자들이 '공돈'으로 쓰기 딱 좋은 수백만~수천만원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시중의 돈맥경화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준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국세청 등에 따르면 150㎡를 초과하는 강남권 주택에 25년 이상 거주한 단독 가구주에게 1000만원 안팎의 현금이 종부세 환급금 명목으로 지난달 지급됐다. 그러나 이 돈은 재테크나 소비시장에 풀리지 않고 대부분 MMF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박관일 신한은행 PB팀장은 "거래고객 상당수가 수백만~수천만원대의 종부세 환급금을 받았는데,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MMF로 옮겨두고 당장 지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MMF 설정액은 지난달 8일 100조원을 돌파한 이후 한 달이 채 안 된 지난 3일 110조원을 넘어서는 등 시중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강남에 있는 한 백화점에서 근무 중인 퍼스널 쇼퍼(부자 고객의 쇼핑을 대신해 주는 직업)는 "최근 총 자산이 100억원을 넘는 '슈퍼리치' 모임에 동석한 적이 있는데,종부세 환급금으로 '당장 소비지출을 늘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며 "다만 '최근 1~2년 새 연말만 되면 나오던 1500만~2000만원의 종부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 아낄 필요는 없어졌다'며 안도하는 압구정동 주민은 있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강남의 중 · 대형 아파트에 거주하는 부자들 가운데 연말에 종부세를 내기 위한 목적만으로 연초부터 적금에 가입해 이 때문에 소비 규모를 줄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백화점업계는 부자들의 소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여성의류 판매 신장률 둔화세가 작년 11월 -2.6%(전년 동월 대비)에서 12월 -13.3%로 확대된 데 이어 올 상반기에는 그 폭이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신용상 금융연구원 연구위원(거시경제실장)은 "전 세계적으로 자산시장이 급격히 위축된 가운데 아무리 강남 부자들이라고 공돈이 생겼다고 소비를 확 늘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종부세 환급금 3000억원이 당장 소비나 재테크 시장에 흘러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일각에서는 이 돈이 자영업자들에 대한 부가세 환급분이라든가,연말정산 환급분 등 다른 환급분 등과 달리 꽤 이른 시간에 소비시장에 풀려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지급 대상이 자금 여력이 비교적 풍부한 자산 규모 수십억원대 이상의 부자들이기 때문이다.

강우신 기업은행 분당파크뷰지점 PB팀장은 "분당 최고의 부촌인 백궁 · 정자 주상복합타운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수백만~수천만원의 종부세 환급을 받았는데,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 돈을 MMF에 넣어두고 용돈처럼 쓰겠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며 "종부세 환급금은 지금 같은 시장 상황 속에서 '대박'을 노리고 주식투자에 쓰기에는 아깝고 그렇다고 유류세 환급금처럼 없는 셈 치기는 많은 돈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가전제품이라든가 명품세일 기간 등에 이 돈이 소비시장으로 흘러들어올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송종현 기자 scre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