沈在箕 < 서울대 명예교수·국어학 >

또다시 한글날이 돌아왔다.

한때 국경일에서 빠져서 민족문화를 드높이고자 애쓰는 사람들에게 몹시 서운한 일이었는데 휴무일(休務日)은 아니지만 다시 국경일로 회복돼 온 국민이 한글날을 기억하며 살게 되었다.

이처럼 한글날을 경축하는 까닭은 우리의 고유문자 한글이 지니는 문화적 상징성 때문이다.

고유문자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데 그 문자가 이 세상의 어떤 음성문자보다도 우수하다는 것이 자랑스러움에 더 큰 자랑스러움을 보태는 이유로 작용한다.

그러나 한글날을 제정하고 경축하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1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1926년 '가갸날'이란 이름으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설움을 고유문자의 존재에 의지해 씻어보고자 시작됐는데 그것도 11월4일,10월29일 등 날짜를 바꾸어 기념하다가 오늘날과 같이 10월9일로 자리잡은 것은 광복을 맞은 1945년에 가서였다.

이와 같이 한글날은 민족의 비극과 맞물려 있고 그 날짜도 혼란을 거듭했다.

따라서 오늘의 시점에서 한글날을 경축하고자 할 때 한글날의 의미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한글'이라는 문자체계의 의미를 한국어 전반으로 확대시킨 점이다.

한글은 창제 당시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이름 붙여진 문자체계이지 그것이 우리말,곧 한국어 전반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 말과 글을 말살시키려 획책하자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순수히 민족문화운동의 차원에서 한글날을 기념하게 되니,'한글=한국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부지불식간에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문자와 언어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글=한국어'라는 인식의 확산은 매우 위험한 내용을 감추게 됐다.

한국어는 한글로만 써야 하는 언어자산이라는 인식을 낳게 한 것이다.

이 인식은 한글만 쓰기 운동의 이론적 바탕을 형성하게 됐고,한글로만 쓸 수 있는 낱말,곧 토박이 고유어만이 한국어라고 하는 잘못된 인식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 우리말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 한자어(漢字語)가 내버려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잘못된 인식은 1960년대 개발독재 체제에서 폐쇄적 민족주의와 맞물리면서 더욱 기세를 떨치게 됐고,2000년을 지속해 온 전통문화를 뿌리째 흔들면서 한자문맹(漢字文盲)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둘째 한글날이 10월9일이라는 것도 원천적으로 잘못 정해진 것이라는 점이다.

이 날을 한글날로 정한 것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해례본(解例本) 훈민정음'에 '정통(正統) 11년 9월 상한(上澣)'이라고 적힌 간기(刊記)에 근거한 것이다.

이 해는 세종 28년(1446년)에 해당한다.

이 책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세종실록'의 기사(記事)에 근거하여 날짜를 잡았는데 그 기사가 정확한 날짜를 가리키고 있지 않아서 부정확한 대로 날짜를 추정했다.

그러나 이날(10월9일)도 정확하게 말하면 '해례본 훈민정음'이라는 책의 간행일이지 '훈민정음'이라는 문자체계를 완성하고 공포한 날은 아니다.

'세종실록'을 정확히 검증해 확인한 훈민정음의 창제일자는 세종 25년(1443년) 12월인데 그것도 12월의 어느 날인지 알 수 없으므로 그러한 기사해석의 통례에 따라 12월 말일을 기준으로 잡으면 양력으로는 1444년 1월28일에 해당한다.

따라서 진정한 한글날은 1월28일이어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백보를 양보해 '해례본 훈민정음'의 출판기념일을 한글날로 삼는다 하여 나쁠 것도 없으니,그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그런대로 용납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한글이 창제되던 당시에 한자(漢字)가 제1문자요 한글이 제2문자였다면 오늘날에는 한글이 제1문자요 한자가 제2문자로 그 위치가 바뀌었을 뿐 우리나라 정신문화를 이끄는 기본 도구로서 한글과 한자는 여전히,아니 앞으로도 영구히 우리나라 문자로서 나란히 사용돼야 한다는 문화인식이 이번 한글날에는 철저히 파급돼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글날의 새로운 문화적 사명이요,새로운 의미다.

/前 국립국어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