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여름,서울 평창동에 있는 서울옥션에 한 소장가가 그림을 들고 왔다.소장품을 경매에 내놓고 싶은데 누구 그림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서울옥션 관계자가 몇 가지 질문을 해보니 이 소장가는 그림을 갖게 된 경위는 물론이고 작품을 거래해본 경험도 없었다. 가져온 작품의 가치가 얼마인지도 알리 만무였다.


서울옥션 경매사인 박혜경 부장의 증언이다.


"한자 서명도 흐릿해 대수롭지 않게 보고 사무실 한 구석에 처박아 놓았죠. 그런데 하루는 이호재 서울옥션 사장이 '어! 저거 이봉상 그림 아니냐'하는 거예요. 그래서 감정 전문가들을 통해 알아보니 이 화백이 그린 '여인'이란 작품이었어요."


이 그림은 그해 10월 경매에 출품됐다. 보존상태는 좋았지만 이 화백의 과작(寡作)인 데다 경매에서 거래된 적도 거의 없어 내정가는 1500만원으로 정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근대미술품을 선호하는 컬렉터에다 미술관까지 경매에 가세했다. 내정가의 두 배를 넘어서자 국립현대미술관이 포기했다. 3500만원이 넘자 미술관이 다 기권하고 이젠 개인 컬렉터만 남았다. 경합은 이후에도 세게 붙어 최종 낙찰가는 4500만원. 내정가에 비해 무려 3배나 뛰었다.


그림 값 5000만원은 미술품 경매시장이 활성화되기 이전인 당시로서는 비교적 고가에 팔린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그림은 금성출판사가 1976년 발간한 '한국현대미술 대표작가 100인 선집(選集)''이봉상편(篇)'의 표지를 장식한 대표작이었다. 이 그림을 사간 소장가가 이 사실을 알았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서울옥션도 감정 전문가들도 몰랐던 부분이다.


석정(石鼎) 이봉상(1916~1970)은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했다. 1929년 제8회 때부터 14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계속 입선했고 1936년에는 작품 '폐적'(廢蹟)이 특선을 했다. 1942년 일본 문무성 주최의 고등교육원 자격 검정시험 미술과에 합격하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석정은 친일 미술단체인 '단광회' 회원이었다. 1943년에는 조선징병을 옹호하는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했고 1944년에는 결전(決戰)을 촉구하는 결전미술전람회에 '진격''짧은 휴식'을 응모해 입선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1955년부터 1970년까지 국전 추천작가,심사위원으로 활동했고 1953년부터 66년까지 홍익대 미대교수 및 학과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회화세계는 초기에는 인상파적 사실주의 경향을 보였으나,1950년대부터는 강렬한 색채,거친 필치,대담한 생략 등을 특징으로 한 야수파적이면서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바뀌었다. 작품 특징으로 경쾌한 색상과 두툼한 질감이 돋보인다.


나무와 산이 주종을 이루는 자연을 주로 그리다가 후반기에는 추상성이 강한 작품을 선보였다. 대상을 최대한 단순화시켜 그 기본적인 요점만 화면에 담으려 했다.


그가 1950년대에 그린 '여인'(40×105cm)은 50년대 중반기의 실내화와는 달리 화면은 보다 장식적이고,평면적인 성향을 보인다. 두툼한 질감과 대상의 단순화로 군더더기 같은 설명을 배제하면서 주제를 직접 부각시킨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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