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에 개봉된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는 투견장에서 돈 가방을 사수하기 위해 난투극을 벌이는 뒷골목 인생들의 영화다. 난무하는 욕설, 잔혹한 싸움과 배신이 숨가쁘게 이어지면서 영화는 비정한 세계의 핵심을 향해 거침없이 치고 들어간다.




영화에서 물고 뜯기는 비정한 세계는 투견들만의 모습이 아니다. 투견장을 둘러싼 돌고 도는 돈과 그 돈을 관리하는 사람과 관리당하는 사람들 간의 돈의 위력과 탐욕이 넘쳐대는 그곳을 우리의 세상으로 풍자한 것이다.




최근 재계가 잇단 경영권 분쟁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두산그룹의 형제간 다툼과 유사한 양상의 경영권을 둘러싼 친족간의 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어 재계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확산되고 있다. 두산그룹의 사례에서 보듯 지분을 둘러싼 친족간의 다툼이 잦아지고 있는 점도 예년과는 다른 특징이다.




이번 두산그룹 형제간의 비리에 대한 폭로전의 내용을 보면 그룹을 경영하면서 수천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외화를 밀반출했다는 내용이 폭로되더니, 그 다음에는 그보다 큰 액수의 수천억원대 분식회계 자진신고라는 고해성사가 뒤따르고, 그리고 증자에 따른 주식매입 대금을 은행돈으로 조달하고 이에 대한 이자를 회사돈으로 대신 지급해 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부당한 방법으로 회사의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임직원에게 은행대출을 알선하여 증자에 참여하게 하고 이 주식을 마치 자기 주식처럼 마음대로 회사지배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 두산그룹의 문제는 족벌경영, 전근대적 의사결정 구조와 경영권 승계 방식, 적은 지분으로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순환출자 등 재벌의 전형적인 지배구조의 문제점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으나, 그 근원은 총수 일가의 개인적인 탐욕과 이로 인한 재산다툼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언론 기사를 보면 박용성 회장이 박용오 전회장을 피도 눈물도 없이 몰아치는 것은 형제간의 피가 다른데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경영권에 대한 집착과 돈에 대한 탐욕이 심하다 하더라도 부모에게 한 피를 나눈 친형제라면 그런 행동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형제간 이라면 기업경영상 이견이 있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어야 대기업의 사회적, 윤리적인 존립기반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모범을 보여야할 할 기업과 최고경영자가 오히려 사회의 기본적인 도덕률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규모기업집단은 재벌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국가권력의 절대적 지원을 받아 성장하고 친족중심의 경영을 하고 있다. 한국의 재벌은 일본의 재벌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1930년 65.1%, 1955년 16.1%, 1975년 18.2%, 1992년 13.8%로 창업자나 그 가족 또는 대주주가 최고경영자를 하는 비율이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일본의 재벌이 국가권력과 유착하여 성장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가족공동체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재벌은 국가권력의 절대적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면서 철저하게 가족공동체에 의한 지배구조를 유지하였다.




지난 6월에 퇴임한 이나모리 가즈오(73) 일본 교세라 그룹의 창업자이자 명예회장의 퇴직금이 너무 낮아서 화제가 되었다. 그의 퇴직금은 6억엔이며, 한국화폐로 환산하면 약 56억원 정도가 된다. 이 때문에 이나모리의 퇴직금 수준을 논의한 교세라 이사들은 “6억엔은 너무 적다”는 의견을 개진했다고 한다. 이나모리 회장은 이에 대해 “나는 일을 즐겼고, 사회에 공헌해 왔다”며 이사들을 설득했으며, 퇴직금도 전액을 교육관련 기관에 기부하기로 했다.




이나모리 회장은 1956년 27세의 나이에 교세라를 창업해서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키운 일본의 입지전적인 기업인이다. 그는 기존의 재벌과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 후 맨주먹으로 대기업을 일으킨 일본벤처기업계의 대명사이다. 전세계 세라믹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는 교세라 그룹은 1984년 설립한 통신업체 KDDI를 비롯 디지털 부품, 휴대폰, 사진기, 디지털 카메라, 반도체 부품 등을 망라한 종합정보통신그룹으로, 1996년에는 소니를 제치고 일본 내 수익률 1위 기업으로 부상했다.




그는 일본의 경영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며, 벤처업계에서는 살아 있는 경영신화로 인정받고 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그의 위대한 점은 철저하게 투명경영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사주를 단 1주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기업은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며, 땀 흘려가며 얻은 이익이 기업이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기업의 흥망성쇠는 결국 경영자의 사람됨에 달려 있다”며 “기업은 당연히 이윤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래도 바른길을 가겠다는 신념과 철학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경영기법보다 CEO의 인격수양에 대해서 거듭 강조한다. 분식회계 등 일련의 기업위기야말로 리더의 인격부재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다.




97년 그는 출가를 감행해 세간의 화제로 떠오른다. 부와 명예보다 선행을 원했던 결과다. 태어났을 때보다 더 선한 마음, 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죽는 것,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다. 그 앞에서 이 세상에서 쌓은 재산, 명예, 지위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 다시 탁발승의 신분으로 돌아가 전국을 다니면서 거리 설법에 나설 계획이다.




두산그룹의 박용만 명예회장이 얼마전 발표한 사과문에서 “두산은 국민과 주주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기업입니다. 앞으로 글로벌 기업을 추구하면서 윤리경영과 투명경영 실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그 말이 앞으로 제대로 실천되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피비린내 나는 재벌가의 암투 속에서 골병들고 신음하는 것은 국민들과 소액주주 이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는 경영학의 기본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다수 주주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 총수일가는 뼈를 깎는 반성과 참회를 해야 할 것이다.




기업을 개인의 것으로 사유화하기보다는 남을 위해 경영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평생을 몸바쳐온 이나모리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이 우리나라의 CEO들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2005년을 비롯해 앞으로도 <피도 눈물도 없이> 기업편이 만들어지지 않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