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관계에서 시작되는 '가스라이팅'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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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잘했으면 내가 바람 피우진 않았을 거야."

20대 직장인 남성 A 씨는 여성 B 씨와 연애를 시작한 후 이성 친구들과 연락을 딱 끊어야 했다. 직장 동료들과 연락할 때에도 여자친구에게 동료의 성별을 밝히는 것은 필수다. B 씨는 수시로 A 씨의 핸드폰을 확인하고 '이 사람은 누구'인지 캐물었다. 때론 "내가 아니면 누가 널 만나겠니"라며 A 씨의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A 씨는 연인의 집착이 선을 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렇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늪과 같았다. 나도 모르게 길들여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A 씨 인생에 B 씨 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순간 그녀는 다른 타겟에게 눈을 돌렸다. B 씨는 바람을 피운 사실을 밝히면서도 "모든 게 너 때문"이라며 모든 잘못을 A 씨에게 돌렸다.

임상 심리 전문가들은 B 씨를 '가스라이터'라 부른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벗어날 수 있을 때 벗어나야하는 존재다.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히 조작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는 패트릭 해밀턴 원작의 미국 영화 '가스등'에서 유래한 말이다. 극 중 남편은 가스등 조도를 낮추고는 아내가 '어둡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남편의 말을 믿은 아내는 점차 판단력이 흐려지고 결국 남편에게만 의존하게 된다.

국내에서는 올해 초 배우 서예지가 연인이었던 김정현을 가스라이팅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가스라이팅'이란 용어가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가수 박군, 제이세라와 같은 연예인들의 가스라이팅 의혹도 이슈가 됐고, 데이트 폭력과 같은 사건에서 자주 언급됐다.

가스라이팅은 비단 연인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가족, 부부, 부모 자식, 가까운 직장 동료 등 친밀함이 바탕이 되는 관계에서 등장한다. 오은영 정신의학과 박사는 TV조선 '미친.사랑.X'에서 "가스라이팅은 평등한 관계보다 힘의 불균형이 있는 수직적 관계에서 발생한다"며 "지속적으로 오랜 시간 이루어져 스스로를 불신하고 의심하게 만들며 생활이 황폐해지도록 만든다"고 말했다.

가스라이터들의 특징에 대해 이동귀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놀면서 배우는 심리학' 채널에서 "'답정너' 같은 게 있다. 내가 원하는 건 분명하고 네가 이걸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나오면 표정이 바뀐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오랜 기간 진행되기 때문에 언제 내가 세뇌됐는지 모르게 내면화될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는 가스라이팅 자가진단법을 공개했다. 다음 중 한 가지라도 해당된다면 가스라이팅 피해자인지 의심해봐야 한다.
△왠지 몰라도 결국 항상 그 사람 방식대로 일이 진행된다.
△'너는 너무 예민해', '네가 무시당하는 이유야', '비난해도 참아야지' 등의 말을 들은 적 있다.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변명한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 잘못한 일이 없는지 점검하게 된다.
△그 사람이 윽박지를까봐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을 알기 전보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정말 힘들다고 입들 모은다. 하지만 가족이나 지인 등 소중한 사람이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것 같다며 이를 바로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김경일 인지심리학 교수는 유튜브 사피엔스 스튜디오를 통해 "유일한 해결방법은 나의 장점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나의 아름다움을 봐주는 사람을 봐야 상대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이어 "사실을 알아야 진실을 들을 준비가 되는 것이 사람"이라며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 알려주는 건 역효과를 만든다"고 경고했다.

김 교수는 "피해자에게 섣불리 진실을 얘기해 주면 안 된다. '너 지금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기 전에 '너는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소하지만 정확한 사실을 계속 알려줘야 한다. 중요한 건 사실에서 멈춰야 한다. 진실로 가서 감당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본인의 상태 진단은 자신이 내릴 판단이기 때문"이라고 조언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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