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움집서 10여명이 취사생활… 청동기시대도 저장·난방 시설 있었다
나의 《한국경제사》Ⅰ·Ⅱ(일조각, 2016)는 기원전 10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경제생활의 역사를 추적한 책이다. 종래의 한국사 연구는 경제사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거나 피상적 설명에 머물렀다. 후대의 평가에 맡겨야겠지만, 주관적으로는 앞선 시대와 뒤이은 시대의 경제적 인과를 실증적으로 해명한 최초의 연구서가 아닌가 자부한다. 그 3000년의 한국 경제사를 60회 연재를 통해 소개한다. 전반 30회는 19세기까지, 후반 30회는 20~21세기를 대상으로 한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체제는 국가주의적 개입을 특질(特質)로 하는 시장경제다. 그 한국형 경제체제가 역사적으로 어떤 조건에서 성립했을까. 연재를 관철하는 궁극의 관심은 이 점에 쏠려 있다.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정주취락의 전개

한반도에서 정착 농경의 성립은 기원전 13세기에서 4세기까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맨 처음 청동기 문화가 꽃핀 곳은 서북의 압록강과 청천강 유역이었다. 그것이 점차 남하해 기원전 12~10세기에 경기와 충청 일대에 가락동유형과 역삼동유형이란 두 문화를 성립시켰다. 가락동유형의 주거지는 대개 장방형으로 단축 5m, 장축 10m, 면적 50㎡의 반지하 움집이다. 역삼동유형의 주거지는 단축 3m, 장축 10m로 가락동유형보다 규모가 작으며 가늘고 길다. 지금까지 발굴된 주거지는 가락동유형이 34기, 역삼동유형이 136기다. 이들 주거지의 내부 시설, 상호 배치, 주변 환경으로부터 청동기 시대의 경제생활이 어땠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반지하 움집에서 1인당 주거 면적은 대개 4∼5㎡다. 이에 가락동유형의 주거지에서 함께 산 인간(사람)은 10~12명으로 소규모 가족 2~3개의 결합에 해당한다. 주거지의 내부 시설로는 식료를 보관한 저장공(貯藏孔)과 불을 지핀 노지(爐址)가 있다. 주거지당 노지 수도 대개 2~3개다. 추정되는 소규모 가족 수와 노지 수가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남녀의 성적 결합으로 자녀를 출산, 양육하는 단위인 소규모 가족은 일찍부터 성립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거지를 복수 공간으로 구분하는 토벽과 같은 시설은 없었다. 이로부터 소규모 가족이 독자적인 생활단위로까지 성립했다고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가락동·역삼동유형에서 개별 주거지는 소규모 가족의 복합체였다고 할 수 있다.

반지하 움집서 10여명이 취사생활… 청동기시대도 저장·난방 시설 있었다
가락동·역삼동유형에서 취락(聚落)은 주거지가 5기를 넘기 힘들었다. 취락 주변에는 소수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분묘지나 농경지 같은 문화공간은 조성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사는 취락의 정주(定住)가 안정적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정주농업이 성립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주거지에서 발굴되는 석기 중에는 수렵에 쓰이는 화살촉이 농경에 쓰이는 칼이나 도끼보다 훨씬 많다. 여전히 수렵과 채취가 농경보다 큰 비중의 생산활동이었으며, 그 점에서 이전의 신석기 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다. 취락을 통합한 권위나 권력의 성립도 명확하지 않은 시대였다.

복합사회의 대두

기원전 9세기 이후 중서부의 금강 하류와 해안에서 또 하나의 청동기 문화가 등장해 북으로는 경기 남부까지, 남으로는 전남과 경남 일원까지 널리 확산했다. 고고학자들은 충남 부여군 송국리에서 처음 발굴됐다고 해서 이 청동기문화를 송국리유형이라 부른다. 이 유형 문화는 여러 면에서 가락동·역삼동유형과는 단절적이다. 고고학자들은 송국리유형의 기원을 둘러싸고 외부에서 유입됐다는 설과 내부에서 발생했다는 설로 대립하고 있다. 송국리유형은 점차 가락동·역삼동유형을 흡수해 갔지만, 두 유형은 기원전 4세기까지 지역을 나누면서 병존했다.

송국리유형의 주거지는 대개 지름 5m, 면적 20㎡ 내외의 원형이나 방형이었다. 가락동·역삼동유형의 절반에 못 미치는 면적으로 소규모 가족 하나의 생활 공간에 해당했다. 주거지의 내부 시설을 보면 저장공이나 노지가 없는 게 일반적이다. 노지는 난방과 조명을 위한 시설이다. 주거지에 노지가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는 고고학적으로 큰 수수께끼다. 어느 학자는 송국리유형의 취락이 계절적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학자는 주거지 내부에 평상이 설치되고 그 위에 화로와 같은 시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어느 주장도 넓은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송국리유형의 취락은 이전 유형에 비해 규모가 훨씬 컸다. 현재까지 발굴된 것 중에는 충남 보령시 관창리의 취락 유적이 가장 큰데, 특정 시점의 주거지가 100기 정도로 추정된다. 경남 진주시 대평리에서는 상이한 시점의 주거지를 합해 모두 350기의 주거지가 발굴됐다. 진주시는 대평리에 청동기문화박물관을 세워놓고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데, 학습차 한 번쯤 들러볼 만하다. 송국리유형의 취락을 둘러싸고서는 방호시설로 환호(環濠)와 목책(木柵)이 설치됐다. 이는 생활자료를 구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취락 간 긴장이 높아진 시대가 됐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취락의 내외에는 분묘지와 경지가 조성됐다. 진주에서 발굴된 논의 규모는 평균 20㎡로 한 사람으로도 개간과 관개가 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작다. 반면 밭의 규모는 훨씬 컸다. 어느 밭은 이랑이 19개인데, 그중 하나는 길이가 123m에 달했다. 인골에서 추출된 안정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그 사람이 평생 섭취한 식료의 종류를 알 수 있다.

관련 연구에 의하면 신석기시대 후기의 인간들은 탄소열량을 주로 도토리나 벼와 같은 야생 식료 채취에 의존했다. 그에 비해 청동기 시대 후기, 곧 송국리유형에서 탄소열량의 주요 공급원은 조, 기장, 수수와 같은 밭작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밭농사가 경제생활의 불가결한 토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은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육상동물과 어패류였다. 수렵과 어로는 여전히 큰 비중의 생산활동을 이뤘다.

송국리유형의 취락은 주거지, 농경지 외에도 공동의 분묘지, 저장시설, 공방(工房), 회의장, 외부와의 교역 장소 등을 보유했다. 고고학자들은 이 같은 구조의 취락을 두고 복합사회(complex society)의 성립을 이야기하고 있다. 취락 공간이 분업적으로 편성된 가운데 인근 취락과 교역을 했다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선 취락을 통합하는 권위나 권력의 작용이 필수적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다수의 고고학자들은 이 사회가 정치적, 착취적, 세습적 권력이 아니라 의례적, 관리적, 획득적 권위에 의해 통합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묘제는 일반적으로 지석묘인데, 그 유적이 호남에서만 1만6000개에 달한다. 지석묘의 입지나 부장품의 위세에서 취락의 일반 성원으로부터 분리된 권력의 존재를 확인하기는 힘든 실정이다.

공동취사

청동기 시대 인간들은 일반적으로 주거지 밖의 야외노지에서 공동취사를 했다. 진주 어은지구 유적에서는 약 30기의 야외노지가 발굴됐다. 유적 크기나 위치로 보아 공동취사 단위는 대략 15~20명이었다. 가락동·역삼동유형이라면 2기의 주거지, 송국리유형이라면 4기의 주거지 결합에 해당한다. 이하 이 공동취사의 단위를 세대(世帶· household)라고 부르고 정의한다. 세대와 가족은 다르다.

세대는 식료, 의료, 기타 생활자료의 취득과 소비의 기초 단위다. 청동기 시대의 소규모 가족이나 개별 주거지는 독자의 세대가 아니었다. 주거지 밖의 야외노지에서 다른 주거지 사람과 공동취사를 했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소규모 가족이 개별 세대로 존재했다는 생각은 고고학적 증거로 보는 한 환상이다. 그 같은 역사의 진보는 다음 회에서 설명하듯이 기원후 2~4세기나 돼서야 관찰된다.

부족

세계의 고고학과 인류학은 선사 시대에서 역사 시대에 이르는 사회의 발전을 군집(band)→부족(tribe)→족장사회(chiefdom)→국가(state)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최초의 군집은 인구 40명 정도의 무리를 말한다. 부족은 인구 500명 전후를 표준으로 한다. 주거지가 100기인 송국리유형의 취락이 그에 해당한다.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전기 가락동·역삼동유형까지만 해도 군집으로서의 특질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후기 송국리유형에 이르러 부족으로 진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철기 시대가 열리면서 서서히 역사 시대의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역사가 반만년이 되도록 유구하다는 단군신화와 고고학적 유적·유물이 이야기하는 실제 역사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영훈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1951년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곡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한신대, 성균관대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정년 퇴직했다. 경제사학회·한국고문서학회·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조선후기사회경제사》 《대한민국역사》 《한국경제사Ⅰ·Ⅱ》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