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윽박지른다고 보신주의 깨질까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박근혜 대통령이 금융권 보신주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지난달 24일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였다. 은행들은 처음엔 뜨악했다. 웬 보신주의인가 싶었다. 하지만 금세 달라졌다. 기술금융과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방안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국민 신한 하나은행 등은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에 담보 없이 최대 10억원까지 빌려주기로 했다는 기술금융지원방안을 잇따라 발표했다. 자신들의 발표가 행여 다른 뉴스에 묻힐세라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역력하다. 한마디로 ‘담보 없이 기술만 보고 돈을 빌려주는 등 중소기업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으니 좀 알아달라’는 투다.

유명무실해진 ‘녹색금융’ 기억

이런 모습은 새로울 게 전혀 없다. 이명박 정부 때도 그랬다. 녹색금융이 그것이다. 녹색산업에 종사하는 기업에 파격적인 조건으로 자금을 빌려준다는 바람이 금융계를 휩쓸었다. 작년 박근혜 정부 출범 때는 창조금융 바람이 거셌다. 은행마다 창조금융위원회를 만드는 등 부산을 떨었다.

지금은 어떤가. 녹색금융은 흔적만 남은 채 사라지다시피했다. 창조금융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가시적 성과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이런 행태를 보여줬던 은행들이다 보니 보신주의 타파를 위한 기술금융 바람도 조만간 사그라질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금융당국의 ‘독려’와 ‘감시’가 약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담보 우선’을 들고 나올 것이란 관측도 상당하다.

금융당국도 이런 우려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단기적으론 기술금융을 독려하면서도, 제도적으로 보신주의를 깨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걸 보면 그렇다. “은행원 개인에 대한 제재를 자제하겠다”거나, “기술금융 실적이 좋은 은행에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신제윤 금융위원장의 발언도 이런 고민에서 나왔다.

여전한 정부에 대한 트라우마

그렇다면 이런 노력으로 금융권의 뿌리 깊은 보신주의가 사라질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답은 ‘아니다’다. 우선은 기술금융에 대한 접근이 잘못됐다. 지금은 보잘 것 없으나 성장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기술금융이다. 그런 만큼 그 기업의 성장 정도에 따라 과실을 나눠 갖는 게 맞다. 그러자면 현재가치를 중시하고 성과배분이 미리 정해진 대출이 아닌, 미래가치를 우선하고 성과배분도 무한대인 자본투자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런 특징을 덮어둔 채 무슨 작전하듯이 돈을 빌려주라면, 또 다른 상흔만 남긴 채 성과 없이 끝날 공산이 크다.

더 큰 문제는 금융산업에 대한 시각이 잘못됐다는 점이다. 금융산업이 공익적 성격을 띠는 것은 분명하지만, 본질은 어디까지나 이익을 추구하는 산업이다. 정책 목표를 위해 리스크를 따지지 말고 돈을 내주고, 수수료를 깎아주라는 것을 언제까지 받아들일 순 없다. 금융당국이 아무리 개인에 대한 제재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돈을 벌기는커녕 손실만 끼치는 직원을 내버려둘 조직도 많지 않다. 더욱이 정부의 말을 들었다가 손실은 손실대로 보고 징계는 징계대로 맞은 트라우마를 가진 은행과 은행원들이 너무나 많다. 화장실 가기 전 태도와 다녀온 뒤의 태도가 전혀 다른 금융당국이 변하지 않는 한 금융권 보신주의를 깨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하영춘 금융부장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