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는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력 등의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권을 빼앗으려 일으키는 정변을 이른다.
일반적으로 쿠데타는 군대, 경찰 등의 무장집단 등에 의해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된다.
정권탈취 후에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계엄령 선포, 언론 통제, 반대파 숙청, 의회 정지, 헌법 개폐 등의 조치를 취한다.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원장은 신간 '박정희 쿠데타 개론'을 통해 한국의 현대 쿠데타 역사를 정리했다.
쿠데타라고 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리곤 한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승만ㆍ전두환 전 대통령의 행적도 쿠데타 관점에서 바라본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선 그동안 많은 책이 출간됐다.
주로 그의 업적을 찬양하거나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견해를 담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도저히 긍정할 수 없다며 그 근거들을 제시한다.
실체를 온전히 알아야 어두운 역사도 제대로 청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 원장은 "가짜를 가차 없이 몰아내고 진짜가 위세를 떨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바란다"고 말한다.
쿠데타의 범주에 이승만, 전두환을 포함시킨 것은 박정희가 한국 쿠데타의 중심이자 최정점이기 때문이란다.
박정희는 이승만을 타도하려는 쿠데타 시도에 가담해 처음으로 쿠데타를 학습했고, 그후 몇 차례 쿠데타를 도모해 마침내 성공했다.
전두환 역시 박정희를 학습하고 계승해서 쿠데타에 성공했다고 들려준다.
먼저 이승만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는 사실상 국가권력을 탈취한 쿠데타였다는 게 저자의 시각. 이런 이승만을 무너뜨리려는 이용문(1916~1953) 준장의 쿠데타 시도에 박정희가 가담했다.
이용문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에도 박정희 쿠데타는 씨앗을 키워간다.
박정희는 1960년 5월 8일 이승만 타도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4·19혁명이 먼저 일어나 무산됐다.
그리고 이듬해 4·19혁명 1주년 기념일에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지만 역시 학생들의 '침묵시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달 5월 12일로 계획을 미뤘으나 비밀 누설로 일시 중단했다.
그리고 나흘 후 5·16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박정희의 쿠데타 뿌리는 이승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1979년 12·12쿠데타는 전두환이 18년 동안 박정희의 측근으로 관찰하고 학습한 소산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5·16쿠데타 다음날 박정희를 만난 그는 5월 18일 육관사관학교 생도들의 5·16 쿠데타 지지시위를 성사시킴으로써 박정희의 최측근이 됐다.
송 원장은 "그래서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7일에 전두환의 신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는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를 계승한 신유신 쿠데타였다"고 단정한다.
그는 이어 "한국 현대사의 초반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쿠데타 놀이로 얼룩졌다"며 "이들이 누린 권력은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 쿠데타라는 불법적 행위를 통해 연장되거나 탄생된 것이니 이들은 사실상 가짜 집권자였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가짜들의 원조는 친일파"라고 규정한 뒤 "나라를 판 대가로 호의호식하다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상륙하자 어느새 모습을 바꿔 반공을 외치며 가짜 애국자로 둔갑한 군상들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나라의 중심이었고, 점차로 기득권 세력을 형성하며 우리 사회를 주물러 왔다"고 비판한다.
책의 제1부는 박정희가 태어나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통해 일본화되는 과정과 체질화된 식민사관을 국민에게 강요한 내용을 다루고, 2부는 그가 교사를 그만두고 만주로 넘어가서 일본군으로 변신했으나 일제 패망 후 귀국해 한국군, 남로당 비밀당원 등으로 잇달아 변신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마지막 3부는 한국 쿠데타를 개괄한 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순서로 그 역사를 살핀다.
저자는 후속작 '박정희와 일본'을 5·16쿠데타 60주년을 맞는 내년 초에 펴낼 예정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벌한 뒤 다리우스왕의 소장품 중 가장 값비싼 보물상자를 발견했다. "여기에는 얼마나 값어치 나가는 물건을 보관해야 할까?" 그가 물었다. 신하들은 돈, 보석, 향수, 향신료 등을 들먹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을 상자에 보관하라고 명했다. 그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였다. 스페인의 문헌학자이자 작가인 이레네 바예호가 쓴 '갈대 속의 영원'(반비)에 나오는 내용이다. 책은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대도서관과 그곳에 책을 채우려는 책 사냥꾼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는 2천여년의 세월을 넘나들면서 책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기원전 3세기, 이집트 파라오들은 책 사냥꾼을 세계 곳곳에 보내 책을 수집했다. 그 집착은 병적이었다. 파라오는 유사 이래 모든 작가의, 모든 작품을 모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도서관을 꿈꿨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도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책을 사고파는 국제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왕들은 자신의 컬렉션을 갖추고자 권력과 금력을 모두 동원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세상 모든 나라의 통치자에게 사신을 보냈다. 그는 편지를 보내 자신의 컬렉션을 위해 시인, 작가, 웅변가, 철학자, 의사, 예언자, 역사가가 쓴 책을 아우르는 모든 작품을 보내라고 했다. 또한 책 구입을 위해 엄청난 돈을 풀었다. 그러자 돈을 노린 사기 행위가 들끓었다. 파피루스를 오래된 것처럼 조작하고, 책의 페이지 수를 늘리려 여러 작품을 뒤섞은 사본이 나돌았으며 위조 텍스트가 난무했다. 책은 이렇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은 서른세 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고열을 호소한 지 열흘 만에 의식을 잃고 사망했다. 유력한 사인(死因)은 말라리아다. 말라리아 원충에 감염된 모기가 옮기는 병이다. 지중해 일대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방대한 제국을 세운 영웅도 모기 한 마리를 당해내지 못한 셈이다. <한 권으로 읽는 미생물 세계사>는 ‘가장 진화한 인간과 가장 원시적인 미생물의 생존을 건 술래잡기’에 주목한다. 인류는 미생물이 유발하는 질병에 맞춰 각종 치료제를 개발했지만, 미생물 역시 그에 맞춰 진화를 거듭했다. 인류의 역사를 미생물과 분리해서 볼 수 없는 이유다. 저자는 일본의 언론인이자 도쿄대·홋카이도대 교수 출신인 이시 히로유키다. 그는 국제연합환경계획(UNEP) 상급 고문을 비롯해 동중유럽환경센터 이사 등을 역임한 환경 전문가다. 이시는 ‘대도시 인구 과밀화와 지구 온난화로 인해 갈수록 미생물이 증식하기 유리해지고 있다’고 봤다. 2013년 처음 출간된 이번 책은 한 차례 개정을 거친 뒤 이번 달 한국어로 출간됐다. 2018년 개정판 머리말에서 이듬해 말 코로나19 창궐을 예견한 듯 서술한 점이 흥미롭다. 그는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은 지금까지 30~40년 주기로 발생했는데, 1968년 ‘홍콩 독감’ 이후 대유행이 발생하지 않았다”며 “잊고 있던 것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시는 “지구의 진정한 지배자는 인간이 아니라 ‘미생물’이다”고 선언한다. 예를 들어 14세기 중반 유럽에서 발발한 페스트는 중세 사회를 완전히 바꿔놨다. 전체 인구의 30~40%가 사망
영국 워릭대 교수가 쓴 근대 과학 이야기 근대 과학은 흔히 '과학 혁명'이라 불리는 16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코페르니쿠스의 걸작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1543)가 발표된 후 우후죽순처럼 천재 과학자들이 나타났다.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을 관찰했고, 로버트 보일은 기체의 특성을 처음으로 묘사했다. 데카르트는 기하학을 연구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고, 레이우엔훅은 현미경으로 세균을 처음 관찰했다. 그리고 만유인력과 운동의 법칙을 설명한 뉴턴은 유럽 곳곳에서 발생한 이런 발견을 종합해 과학혁명을 완성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과학사는 이렇게 묘사된다. 케임브리지대의 유명 역사학자인 허버트 버터필드는 이를 두고 "과학혁명은 서구의 창조적인 산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임스 포스켓 영국 워릭대 교수는 신간 '과학의 반쪽사'(블랙피쉬)에서 이런 과학의 역사는 편견으로 가득 찼고, 기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근대과학은 언제나 전 세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모인 사람과 아이디어에 의존했다"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근대과학의 문을 열어젖힌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연구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문헌에서 가져온 최신 수학 기법에 의존했다. 또한 이 시기는 오스만제국의 천문학자들이 이슬람의 과학 지식에 기독교와 유대교 사상가들로부터 가져온 새로운 아이디어를 결합해 지중해를 넘나들던 무렵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명나라 천문학자들은 중국 고전과 라틴어로 적힌 과학 문헌을 함께 공부했고, 인도학자들은 그때까지 나온 것 가운데 가장 정확한 천문표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16~17세기에는 세계 곳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