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도시 문명·환경 파괴…인간 협력이 낳은 '두 얼굴'
‘터널 비전(tunnel vision)’은 좁고 어두운 원형 터널에서 운전할 때 출구만 밝게 보이는 것처럼 중심 시력은 유지하지만 주변 시야가 상실된 상태를 뜻하는 의학용어다. 심리학 및 사회학에서는 눈앞의 상황에만 집중하느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파악하는 능력이 저하된 심리상태 또는 상황을 의미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폴 시브라이트 프랑스 툴루즈 경제대 교수는 저서 《낯선 사람들과의 동행(the company of strangers)》에서 이 용어를 새롭게 정의한다. “거대한 네트워크에 속한 구성원 개개인이 전체적인 성과에 대해 자세히 알거나 신경 쓸 필요 없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게 만드는 능력”이며 “인간의 능력은 터널 비전을 구체화한 형태”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수정해야 하는 시스템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시스템을 유지하고 활성화시키는 긍정적 요인”으로 터널 비전을 통해 분업과 전문화가 이뤄지고 분업 참가자들의 상호의존성도 높아지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런 터널 비전의 개념은 이 책의 주제인 ‘책임자 없이 이뤄지는 협력’ 또는 ‘낯선 사람들과의 동행’과 연결된다. 저자가 책머리에 던지는 “일개 유인원이었던 인류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글로벌 분업체계’를 통해 작동되는 거대한 사회를 만들 수 있었는가”란 질문에 답을 제시하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다.

이 책은 인류가 어떻게 씨족공동체의 범위를 벗어나 낯선 사람들과 협력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역사, 경제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잔인하고 경계심 많은 유인원의 본능을 지닌 인류가 낯선 사람들과 동행하는 ‘놀라운 실험’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온갖 어려움과 난관 속에서도 그 실험을 멈추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향후 중지될 수도 있는 이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밝힌다. 인간의 진화사를 고찰하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나 산업화되고 네트워킹된 생활은 수백만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돼온 인류 진화의 필연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불과 1만 년 전에 시작된 위대한 실험의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터널 비전에 바탕한 분업과 상호의존성은 모든 참여자의 의도는 물론이고 상상마저 뛰어넘는 결과를 낳았다. 대도시의 발달, 너무나 복잡한 기능을 지닌 시장, 집단지식의 증가,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 모든 일은 누가 계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호작용이 낳은 결과물이다. 당연하게도 어떤 결과는 아주 희망적이지만, 또 어떤 결과는 엄청난 골칫덩이가 됐다.

협력은 양날의 검이다. 인간은 협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신뢰와 평화로운 삶의 토대를 건설했지만, 동시에 대립하는 집단과 집단의 범위에서 이뤄진 협력은 가장 흉포한 침략 행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낯선 사람들과의 동행, 즉 협력의 최신 용어는 ‘세계화’다.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는 협력의 횟수 증가나 범위 확장이 아니라 협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더 나은 목적이 필요하다”며 “집단 간의 신뢰나 협력은 개인 간 신뢰만큼이나 인간의 창의력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다양한 학문을 통합해 인간 문명과 사회, 협력의 다층적인 면을 살펴보며 지금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책이다. 터널 비전 등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시각이 참신하다. 다만 구성이 산만하고 스토리텔링이 정교하지 못해 재미있는 ‘빅 히스토리’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