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처럼 부드러운 색감 지닌 '옻칠 회화'
작가 채림(56·사진)은 보석 디자이너 시절 보석 장신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지지체를 찾다 우연히 접한 ‘옻’에 푹 빠졌다. 이후 한국 전통 공예기법인 ‘옻칠’과 보석공예를 접목해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자연과 세공이 어우러진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추구해왔다. 미국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인 로버트 모건은 평면 회화 위에 보석 오브제를 붙인 그의 작품들을 ‘조각 회화’라고 명명했다.

지난 10일 서울 청담동 학고재청담에서 개막한 채림의 개인전 ‘멀리에서’는 보석의 장식적 의미와 옻의 공예적 가치를 넘어선 순수미술로의 확장을 시도하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보석공예와 옻칠을 과감히 분리해 각 재료가 가진 개별적인 아름다움과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에 집중한 신작들을 선보인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설치작품 ‘비 온 후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개와 진주를 황동과 이를 금색, 은색 등으로 도금한 가지에 올려 브로치처럼 만든 뒤 평면적으로 배열했다. 덩굴과 나뭇가지를 연상시키는 조형요소를 활용해 비 온 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결과 짙은 숲의 향기, 쓸쓸하고 고적한 기운을 작품에 투영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채 작가는 “흰 벽에 드리워진 여러 가지 그림자에 집중했다”며 “그림자를 통해 마치 부드러운 연필 드로잉이 연상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과수원 하늘’ 시리즈도 보석 고유의 조형미에 집중한 작품이다. 이 시리즈에서도 과수원에서 바라본 풍경 속 그리움과 추억에 대한 단상을 구조물로 구현하기 위해 배경의 옻칠을 생략했다.

전시 제목인 ‘멀리에서’ 시리즈는 보석의 장식성을 내려놓고 순수 옻칠만을 이용한 회화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 이 시리즈는 끈적거리는 성질을 가진 옻을 두텁게 쌓아 반복적으로 칠했는데도 유화처럼 부드러운 색감을 지닌다. 안개가 낀 듯한 채색 때문인지 마치 클로드 모네의 ‘인상 : 해돋이’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그는 “제주도에서 느꼈던 아련했던 기억 속 여러 풍경을 옻칠을 통한 모더니즘 회화로 풀어보고자 했다”며 “한국의 각 지방별 특색을 옻칠로 담아내는 프로젝트인 ‘아리랑 칸타빌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