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올인'한 박정희…정부를 '세계 경영' 위한 商社처럼 바꿨다
석유화학의 역사

1970년대까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끈 제1의 수출품은 의류, 직물, 섬유 제품이었다. 1965년 이후 스웨터 와이셔츠 아동복 등 봉제품의 수출이 증가하자 직물과 화학섬유의 수요가 폭발했다. 수출을 위한 공장 건설은 철강과 기계에 대한 수요를 유발했다. 1967년 착수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화학, 철강, 기계공업의 건설을 핵심 프로젝트로 했다. 1968년 울산 석유화학공업단지가 착공된 것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였다. 당초 미국의 자문회사는 한국 경제의 능력을 고려해 에틸렌 연산 3만t 규모를 권했다. 한국 정부는 연산 10만t 규모를 선택했다. 한국의 석유화학공업은 좁은 국내 시장을 위한 내수공업이 아니라 넓은 세계시장을 겨냥한 수출공업으로 처음부터 건설됐다.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공장 건설은 출발부터 세계적 수준의 ‘규모의 경제’를 충족해야 했다. 공업과 기업의 전통이 빈약한 나라에서 민간 기업이 홀로 그 일을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정부는 공장을 건설하고 경영할 능력을 갖춘 소수의 기업가를 선발하고 지원했다. 공장 건설자금뿐 아니라 부지, 도로, 전기, 용수를 값싸게 공급해줬다. 국내 시장의 독점적 지위도 용인했다. 이를 위해 외국산 섬유류의 국내 진입도 막아줬다.

그렇게 육성된 석유화학 대기업은 어느 단계에 이르러 국제시장에 내몰렸다. 그들은 정부가 요구하는 수출 과표를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러기 위해선 도입 기술은 첨단이어야 했고, 개발 제품은 창의적이어야 했다. 또 공장 경영은 과학적이어야 했고, 마케팅은 공격적이어야 했다. 수출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한 제1의 조건은 기업가의 우수한 능력이었다.
1968년 열린 박정희 대통령 주재의 수출진흥확대회의.
1968년 열린 박정희 대통령 주재의 수출진흥확대회의.
세계경영

이상과 같은 석유화학의 역사는 1963~1997년에 걸친 고도성장이 정부와 기업의 어떤 행동원리에 기반을 둔 것인지 잘 보여준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계경영’을 통한 국가경제의 단계적 건설이었다. 목표는 자립적 국가경제 건설과 중진국 상위권으로의 진입이었다. 수단은 수출 증가와 고도화였다. 수출의 지속적 증가를 위해 수출공업은 첨단 규모와 기술로 건설됐다. 이를 위해 대량의 외자와 기술이 도입돼 유능한 기업가에게 배분됐다. 수출이 증가하자 국가 경제의 상환 능력이 커졌으며, 이는 외자와 기술의 추가 도입을 가능케 했다. 이후 보다 고차의 수출공업이 건설됐으며, 이는 국가경제를 더욱 자립적인 구조로 이끌었다.

오원철은 상공부 관료로 1968~1972년 석유화학공업단지 건설과 뒤이은 중화학 공업화에서 실무 책임자 역할을 했다. 그는 고도성장을 이끈 박정희 정부의 행동원리를 ‘엔지니어링 어프로치’라고 정의했다. 이는 거대 공장의 건설을 위해 어떤 방법이 가장 합리적인지를 각종 자료와 수치로 정립하는 과학을 말한다. 이 방식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선 정책 목표가 막연한 슬로건이 아니라 특정 기간에 달성돼야 할 특정 수치로 구체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목표 수치는 사전에 산업별, 지역별, 기업별 가능치를 검토하고 할당한 결과로 신중하게 도출됐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제반 유인과 수단은 강력하고 충분해야 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 같은 공학적 접근을 통해 국가경제의 구조를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추구해 올라가는 단계성과 과학성을 실현했다. 그 추진력은 수출을 통한 세계경영의 다이내믹스에서 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정부를 사실상 세계경영을 위한 거대한 상사(商社) 조직으로 이끌었다.
1979년 정수직업훈련원에 들러 훈련생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
1979년 정수직업훈련원에 들러 훈련생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
조정과 협동

자립적 국가 경제 건설을 위한 공학적 접근은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으로 뒷받침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개발 정책과 이념에 동조하는 관료, 기업가, 경제단체, 과학자, 교수로 구성한 관민합동의 회의체를 운영했다. 1965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매월 상공부가 개최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1965년 2월부터 1979년 9월까지 176개월간 총 153회 열렸다. 처음에는 20~30명의 소규모 회의였으나 점차 민간 기업가와 전문가도 참여하는 170여 명의 대규모 회의로 확대됐다. 매월 수출 실적을 점검하고, 수출 애로를 타개하고, 세계경제 동향을 탐지했다.

이와 별도로 박 대통령은 매월 경제기획원이 주관하는 ‘월간경제동향보고’라는 회의에도 참석했다. 이 회의 역시 1965년부터 시작해 1979년까지 도합 146회 열렸다. 여기선 물가와 국제수지 등 국가경제의 거시 지표를 점검하는 것부터 개별 산업정책과 공기업의 구조조정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과제를 다뤘다. 두 회의는 관계, 업계, 학계가 축적한 고급정보를 수집, 분석, 전파함으로써 개발정책의 모색, 입안, 결정, 집행, 조정을 위한 극히 효율적인 조정과 협동 체계를 이루는 데 공헌했다. 동시대 15년간이나 매월 두 종류의 회의체를 운영한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매월 두 회의를 주재한 대통령의 ‘개발에 대한 집념’은 더없이 강렬했다. 그는 반복되는 회의에서 어느덧 최고 수준의 경제학자로 훈련돼갔다.

규율 능력

1972년 울산 석유화학공업단지에서 준공된 한양화학(현 한화케미칼) 공장.
1972년 울산 석유화학공업단지에서 준공된 한양화학(현 한화케미칼) 공장.
1966~1972년 국민총생산에 대비된 투자율은 25%의 높은 수준이었지만 국내저축률은 15%에 불과했다. 모자라는 투자자금은 해외저축으로 충당됐다. 같은 기간 공공차관, 상업차관, 은행차관, 외국인 직접투자, 미국 원조, 일본으로부터의 청구권 및 경제협력 자금을 합해 총 48억여달러의 해외저축이 도입됐다. 조성된 내·외자에 대해 정부는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했다. 1967~1971년 금융기관의 총대출 가운데 정부 의지에 따라 이뤄지는 정책금융이 48%의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정부는 국유화된 은행을 통해 국내 저축의 배분을 좌우했을 뿐 아니라 차관과 직접투자에 대한 인허가와 지불보증을 통해 기업의 투자와 경영에 깊숙이 간여했다.

정책금융의 다른 중요 부분은 장단기 수출금융이었다. 1970년대 수출금융의 연간 금리는 6~8%로 일반대출 금리 15~24%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수출금융에서 창출된 지대(地代), 곧 불로소득은 국민순생산(NNP)의 2~3%에 달했다. 수출업자들은 이 밖에도 조세와 관세의 커다란 혜택을 받았다. 수출업자에게 주어진 금융과 세제의 보조금은 공정환율의 평균 23%나 됐다. 많은 후진국에서 그랬듯이 정부가 재량으로 금융을 배분할 경우 각종 연고를 배제하기 힘들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경제가 그런 부작용을 낮은 수준에서 관리한 것은 집권자의 더없이 강렬한 ‘개발집념’과 ‘세계경영’이란 개발전략에 내재한 규율 능력 덕분이었다.

정부는 능력이 검증된 우수한 기업가를 지원 대상으로 선정했으며, 기업은 정부 지원에 일정한 성과로 보답해야 했다. 예컨대 수출지원금융은 외국과의 수출 계약에 성공해 신용장을 취득한 업자만을 대상으로 했다. 수출업자의 성과에 연동한 지대의 배분은 국내 우수한 인적, 물적 자본을 수출부문으로 내몰았다.

기술과 숙련의 양성

박정희 정부는 숙련노동도 대량 양성했다. 1967년 직업훈련법을 제정했으며, 1979년까지 700개에 달하는 직업훈련소를 곳곳에 설치했다. 같은 기간 중학교 졸업자로서 직업훈련을 받아 기능공 자격을 취득한 사람은 90만 명에 달했다. 기능공 양성을 위한 보다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은 공업고등학교에서 이뤄졌다. 1966년 46개교에 불과한 공업고등학교가 1979년까지 96개교로 증가했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포한 박정희 대통령은 공업고등학교 교육에 특별한 열정을 보였다. 학생들에게는 장학금과 기숙사의 특혜가 주어졌다.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전원 2급 기능사 자격을 취득하고 중공업 분야의 대기업에 취직했다. 일정 기간을 근무하면 병역도 면제됐다. 박 대통령의 기능공 양성은 공업화에 필요한 숙련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정책을 넘어 농어촌의 가난한 청년들에게 계층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정책이기도 했다. 1967~1979년 직업훈련과 공업고등학교를 통해 양성된 120만 명에 달하는 기능공은 이후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이거나 중견 간부로서, 또는 소규모 사업체의 경영자로서 신(新)중산층의 기층을 형성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