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신나는 방학이다"

21일부터 초중고교생들의 겨울방학이 시작된다.

무거운 책가방에서 벗어나 마음껏 뛰놀 수 있는데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
있는 만큼 아이들은 즐겁기만 하다.

어느 가정이나 1년중 이 계절만큼 온가족이 들뜨는 때도 드물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그동안 미뤄뒀던 가족 나들이며 모처럼의 오붓한
외식, 얄팍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선물가게를 기웃대는 쇼핑계획도
세워보게 마련이다.

그렇다.

바람이 차더라도 가슴을 활짝 열고 나서 보자.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영화관이나 훈훈한 인정이 넘치는 연극무대, 두
팔 벌리고 자연을 호흡할 수 있는 야외 놀이공원, 아름다운 선율에 젖는
음악회는 또 얼마나 좋은가.

행복한 가족이 함께 가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건 함박웃음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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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구보씨 가족의 극장나들이 ]]

일요일 아침, 소설가 구보씨는 여느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며칠 전부터 둘째 녀석이 "점박이 강아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도
보채는 바람에 "온가족이 작정(?)하고 영화보는 날"로 잡은게 바로
오늘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구보씨는 내심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모처럼 좋은 부모노릇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웬걸,
어제 오전 내내 극장에 전화를 걸었는데도 계속 통화중이어서 예약을 못한
것이다.

남들처럼 잘팔리는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목록 말석에라도 이름을
걸쳐보는 건 고사하고 겨우 등단만 한채 월급쟁이로 하루하루 고달프게
사는 처지인지라 어쩌다 한번 애들한테 근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은 그야말로 굴뚝같았다.

그래도 어제 퇴근길에 서울극장 창구에 들러 예매표 5장을 확보한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딴에는 손꼽아 기다리던 방학에다 크리스마스 기분까지 겹쳐 엉덩이를
흔들어대던 녀석들이 어젯밤 잠을 설쳐가며 "아빠, 틀림없죠?"라고 몇번씩
다짐받던 생각이 아슴거려 "내 오늘은 뭔가를 보여주리라" 단단히 벼르던
참이었다.

아내도 들떠 보였다.

거실 바닥을 통통거리며 아침준비에 부산한 아내를 등지고 앉아 구보씨는
극장나들이 계획을 놓고 도상연습에 들어갔다.

그래, 명보극장에서 혈통좋은 영국 개 101마리가 단체출연한다는
"101달마시안"을 "조조할인"으로 보는거야.

첫회가 11시에 시작된다니 일찍 가면 자리는 있겠지.

날씨도 이만 하면 괜찮고.

구보씨 가족이 을지로3가까지 지하철을 타고 명보극장에 도착한 시각은
얼추 10시가 넘어서였다.

매표구에는 이미 소풍나온 유치원 아이들처럼 길게 줄지어 선
가족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구보씨 부부와 초등학교 5학년인 딸, 그 밑으로 두살 터울의 두 아들,
해서 5명의 입장료는 5,500원씩 2만7,500원.

"101달마시안"은 구보씨에게도 낯설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어려서 본 동화책 "101마리 개들의 모험"을 월트디즈니가 만화영화로
선보였다가 다시 실사영화로 만든 것이어서 내용이야 별 다를게 없었다.

그러나 흰 바탕에 알록달록 무늬를 달고 온갖 예쁜 짓을 다하는
강아지들은 앞줄에 앉은 둘쨋놈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아내는 좌우를 흘끗거리며 녀석의 웃음을 말리느라 연신 팔을 내저었다.

구보씨조차 가가대소 목젖이 보일 때까지 입을 벌리는 통에 막내가 들고
있던 팝콘이 극장 바닥에 쏟아질 지경이었다.

구보씨 가족의 극장 나들이는 이렇게 해서 매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고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입김을 내뿜으며 껑충거렸다.

자, 이제는 딸아이가 좋아하는 농구영화 차례다.

종로3가 서울극장까지는 지하철로 한구역밖에 안되고 예약도 돼 있으니
입장권을 받기만 하면 그만이다.

햄버거와 김밥으로 점심을 때웠지만 누구 하나 불평이 없는 걸 보면 그래,
행복이란 이런 거야.

농구영화 "스페이스 잼"은 90년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산업인
애니메이션과 미국 NBA가 만난 환상의 무대.

"루니 툰즈"의 익살스런 만화캐릭터가 총출동하는데다 농구 영웅 마이클
조던이 직접 출연, 외계인과의 농구시합을 벌이다니.

딸아이뿐만 아니라 구보씨 가족 전체가 한 팀을 이뤄 열띤 응원을
펼치는데 3차원 컴퓨터그래픽으로 완성된 기기묘묘한 장면들이 극장안을
더욱 뜨겁게 달궜다.

열기때문에 얼굴이 발그레해진 가족이 3시30분쯤 극장문을 나서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막내가 꼭 봐야한다고 침을 놨던 심형래주연의 공룡영화 "드래곤 투카"는
마침 어린이대공원 무지개극장에서 상영중이어서 같은 값이면 눈이 더
내려줬으면 싶었다.

건대역에서 어린이회관까지 걷는 동안 아이들은 얼룩무늬 달마시안처럼
뛰고 솟았다.

6시에 시작되는 마지막회를 1시간이나 줄서서 기다리는 동안 아내는
"29일부터 KOEX 넓은 극장에서도 볼수 있다는데"하며 막내를 꼬득여봤지만
녀석은 몇 사람 건너 또래아이가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에만 눈을 박고 있다.

700석규모의 극장안은 어린 공룡팬들로 가득차 흡사 놀이동산에 온 것
같았다.

현대와 조선시대를 왔다갔다 하는 영구는 역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프로였다.

공룡 투카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눈을 부라려도 아이들은 그저
깔깔거린다.

그러나 하루에 극장 세곳을 돌며 강행군한 구보씨로서는 눈꺼풀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중간중간 웃음소리에 잠을 깨다 말다 하던 그가 아내에게 옆구리를 찔려
일어났을 때는 성급한 사람들이 이미 출구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밖은 어둠이 완연했다.

장난감 공룡을 받고 좋아 어쩔줄 모르는 막내녀석을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구보씨가족이 개선장군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집앞에 다다르자
그때까지 듬성듬성 내리던 진눈깨비가 함박눈으로 변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승리감에 도취된 구보씨가 흐뭇한 표정으로 아파트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꼽는데 갑자기 손끝에 전기가 찌릿한다.

앗 뜨거라, 깜짝 놀란 구보씨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아빠, 오늘 극장 가기로 해놓고 이렇게 늦잠만 자면 어떡해요"

작은 녀석이 손가락을 재차 깨물었다.

< 고두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