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한 단백질의 정확한 구조 분석은 신약 개발에 걸리는 시간을 매우 단축시킬 수 있다. 또 지금껏 개발되지 않았던 새로운 신약 타깃을 확보하는 데에 방사광가속기는 필수적인 장비다. 하지만 현재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의 가속기 사용률은 현저히 낮으며, 대부분 기초연구 단계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기업의 사용을 늘리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 빔라인... 1990년 후반부터 포항의 방사광가속기는 구조생물학 연구를 위한 빔라인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3개의 빔라인이 단백질 구조 분석을 위해 가동되고 있다. / 사진=포항가속기연구소
4세대 방사광가속기 빔라인... 1990년 후반부터 포항의 방사광가속기는 구조생물학 연구를 위한 빔라인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3개의 빔라인이 단백질 구조 분석을 위해 가동되고 있다. / 사진=포항가속기연구소
구조생물학은 단백질과 같은 생체고분자의 입체구조를 고해상도로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다. 1953년에 발표된 DNA 이중나선 구조는 생물학을 완전히 바꿔놓았으며, 1960년대 초반에 발표된 헤모글로빈 구조는 오늘날 생화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획기적인 발견이다.

구조생물학은 바이오의약품이나 화합물의약품의 작동원리를 원자 수준에서 보여주기 때문에 의약품 개발에서도 중요한 기술이다. 단백질 입체구조는 X선 회절방법을 이용하거나 극저온전자현미경을 이용해 밝혀낼 수 있다. 이 중 X선 회절방법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X선 광원이 필요한데 이렇게 강한 X선을 만드는 장비가 방사광가속기다.

포항의 방사광가속기는 1990년 후반부터 구조생물학 연구를 위한 빔라인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5C, 7A, 11C 세 개의 빔라인이 단백질의 구조 분석을 위해 가동되고 있다.
초기에 소수의 대학 실험실에 불과하던 구조생물학 커뮤니티는 현재 70개 이상의 실험실로 확대됐다. 그리고 성능이 더욱 뛰어난 새로운 방사광가속기를 충북 오창에 건설하는 프로젝트가 금년부터 시작됐으며 2028년부터 가동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FDA 승인 약물 중 40%가 구조 활용 약물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치료제는 표적이 되는 특정 단백질에 결합해서 단백질 기능을 억제하거나 증가시켜서 질병을 치료한다. 예를 들어 많은 암세포는 세포분열을 조절하는 단백질들이 변형되면서 지나치게 활성이 증가돼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렇게 고장난 단백질에 결합해서 기능을 억제하면 항암제가 될 수 있다.

신약 개발은 수많은 후보물질에서 효능이 있는 물질을 선별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초기에 발굴된 후보물질은 대체로 결합력이 약한 경우가 많다. 이때 단백질과 결합된 후보물질의 구조를 알 수 있다면 좀 더 결합력이 증대된 신규 분자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표적단백질 입체구조는 신약 개발에 필요한 플랫폼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거의 모든 제약회사에서는 이미 신약 개발 프로그램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작년에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53개의 약물 중에서 40%에 해당하는 21개는 구조를 활용해 개발된 약물이다. 특히 최근 극저온전자현미경을 비롯한 구조생물학 분야의 기술 발전으로 인해 신약 개발에서 단백질 구조의 활용도는 더욱 커지고 있다. 코로나19 표면 스파이크 단백질 구조가 바이러스 유전자 서열이 발표된 지 5주 만에 규명됐다는 것은 구조생물학의 발전 속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렇게 규명된 코로나 스파이크 단백질 구조는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등 여러 제약회사가 효과적인 백신을 개발하는 데 활용됐으며, 신속한 백신 개발에 큰 몫을 하였다.

최근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의 도입과 함께 컴퓨터를 이용한 분자설계의 속도와 정확도가 획기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구조에 기반한 신약 개발을 더욱 촉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규모가 작은 국내 바이오텍, 방사광가속기 활용 여력 부족해

지난 30년 동안 국내 구조생물학 분야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학문적인 성과에 비해 신약이나 백신 개발 등 산업 분야로의 응용은 아직까지 크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방사광가속기연구소, 기업과 대학의 구조생물학 연구자들이 함께 풀어야 할 숙제다.

단백질 구조를 이용한 신약 개발 기술을 SBDD(Structure Based Drug Discovery)라고 한다. SBDD 기술이 미국과 유럽 등 대형 제약회사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이후 지난 20년간 연구개발 결과를 보면 SBDD 방법은 고전적인 신약 개발 방법에 비하여 훨씬 성공확률이 높고, 빠르고, 적은 비용으로 신약 개발이 가능하다고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제약·바이오 회사 개발 파이프라인에서 단백질 구조와 분자설계 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은 실정이며, 포항가속기와 같은 대형장비의 활용도도 기대보다 현저히 낮은 상황이다. 이런 문제는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국내 제약·바이오 회사의 규모가 작고, 연구개발 여건이 열악하며, SBDD를 도입하기에는 인력이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국내 구조생물학 분야가 그동안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많은 성장을 했지만, 제약·바이오산업에서 쉽게 활용이 될 만큼 충분한 인력이나 연구 인프라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경우 규모가 작은 바이오텍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연구대행기업(CRO)을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국내 CRO 기업들도 규모가 작고 시장이 크지 않기 때문에 민간기업이 구조 기반 신약 개발을 대행하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다.

제약업계 정통한 전문가의 정책적 제언 필요해

가속기와 전자현미경 설치에 조 단위의 막대한 예산이 이미 투입됐다는 것을 고려하면, 산업체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 병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정부의 현실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우선 가속기나 극저온전자현미경과 같은 대형 장비의 운영과 정책 결정에 제약·바이오 기업의 현실을 잘 알고 있고 가속기나 전자현미경 활용에 정통한 구조 기반 신약 개발 전문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영국 다이아몬드 가속기의 경우 공학 분야를 담당하는 디렉터와 바이오 연구를 담당하는 디렉터가 함께 가속기를 운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둘째로는 연구 전문 인력이나 장비가 부족한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이 구조 기반 신약 개발 기술에 쉽게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정부 프로그램 추진이 필요하다. 구조 기반 신약 개발 연구는 단순히 가속기나 현미경 장비의 활용만으로 성공할 수 없으며, 유전자 합성에서 단백질 생산, 정제, 결정화 실험, 가속기, 전자현미경 데이터 분석 등 다양한 전문기술이 종합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전문가를 모두 확보할 수 있는 국내 제약기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가속기나 전자현미경 장비만 제공하는 정책으로는 기술 확산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관련 전문 연구진과 장비를 모아서 기업의 연구활동을 도와주고 컨설팅해줄 수 있는 공공기관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기업의 구조 연구를 도와줄 수 있는 정부 연구개발 사업이 추진돼서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기업의 구조 기반 신약 개발 연구 수준을 빠르게 선진국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의 경우 가속기와 원리는 다르지만 단백질 구조를 분석하는 거대 장비인 극저온전자현미경(Cryo-EM)의 확산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Transformative High Resolution Cryo-Electron Microscopy’ 프로그램을 통해 3개 기관에 총 1억2950만 달러(약 1498억 원)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2020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가속기, 전자현미경의 발전과 함께 구조생물학은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혁신적인 기술 개발은 기초학문 발전과 함께 구조에 기반한 의약품 개발 과정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포항가속기와 극저온전자현미경은 주로 기초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해왔지만, 앞으로는 화합물이나 항체 기반 의약품 개발에도 큰 역할을 담당해 국가 과학 경쟁력과 바이오산업 발전에 핵심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장치 개발과 운영을 담당할 가속기연구소와 연구를 수행할 이용자 그룹들 간 원활한 협력이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저자 소개>

[이슈 하이라이트 ❸] 신약 개발 시간 단축시키는 방사광가속기, 기업의 사용을 늘리려면
이지오

구조생물학 전문가로 현재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포막단백질연구소 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1987년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고 1995년 하버드대학교 생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부터 2019년까지 KAIST 화학과 교수로 면역 수용체 단백질의 구조연구를 수행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9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