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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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세계적으로 퍼지자 국내 벤처투자업계는 혼란에 휩싸였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대면’과 ‘소통’을 근간으로 한 공유오피스와 공유차, 여행 관련 유니콘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이 줄줄이 위기에 빠지며 최근 몇 년간 파죽지세로 성장해온 국내 벤처투자산업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 해가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 벤처투자 시장에서 위기의 그림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조심스러워진 투자심리 탓에 새로운 유니콘기업의 등장은 보기 어려웠지만 유니콘기업의 씨앗을 품은 예비 유니콘기업의 층은 더 두터워졌다. 벤처기업들은 코로나19가 흔든 산업의 지형 속에서 ‘게임 체인저’로 거듭났다. 그리고 이들의 뒤엔 벤처캐피털(VC)과 모험자본 공급자(LP)들이 있었다.

대규모 정책자금에 하반기 빠른 회복

벤처 투자 2년 연속 4兆 돌파…예비 유니콘 많아졌다
올해 벤처투자 자금은 지난 3분기까지 2조8485억원으로 지난해(4조2777억원)에 이어 2년 연속 4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연초부터 시작된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상반기 신규 투자는 1조6565억원에 그쳤지만 3분기에만 1조1920억원으로 본격적인 회복세를 그렸다. 3분기 기준으로 작년 대비 6%가량 증가한 수치다. 4분기 이후 코로나19 백신 개발 기대로 투자심리가 더 회복된 것을 고려하면 2년 연속 벤처투자 4조원 수성이 가능할 전망이다.

코로나 한파를 뚫은 벤처투자업계를 지탱한 것은 모태펀드 운용사 한국벤처투자를 비롯해 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성장사다리펀드),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의 몫이 컸다. 코로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예측하기 힘들었던 올해 초 이들 기관은 상반기에만 1조5000억원에 달하는 정책 자금을 풀었다.

급격한 투자심리 냉각을 막기 위해 펀드 최소 결성금액의 70%만 모아도 우선 펀드를 결성해 투자를 시작할 수 있는 ‘패스트 클로징’ 제도를 전격 도입하기도 했다. 그 결과 전체 투자금액 감소에도 투자 기업 수(1273개)와 펀드 결성 금액(2조6498억원)은 작년보다 오히려 늘었다.

정책금융기관의 과감한 출자와 이를 종잣돈으로 민간 자금을 모아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VC들이 발로 뛴 결과다.

더 탄탄해진 벤처생태계

국내 스타트업의 유니콘기업 등극 소식은 올해 뜸했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 인재들이 창업에 나서면서 ‘예비 유니콘’급 기업이 늘고, 투자층은 더 탄탄해졌다. 쿠팡, 위메프 등 대형 커머스 산업이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서 당근마켓(중고거래), 아이디어스(온라인 수공예품 마켓), 에이블리(셀럽 마켓 플랫폼) 등 세부 시장에 특화한 기업들이 투자를 받아 빠르게 성장했다. 베스핀글로벌(클라우드), 루닛(의료 AI), 오늘의집(인테리어), 리디(전자책), 리브스메드(의료기기), 프레시지(밀키트) 등도 VC들의 투자를 받아 예비 유니콘기업으로 떠올랐다.

모태펀드를 비롯한 정책금융기관이 전용 펀드 등 전략적 출자 지원에 나서면서 오랜 기간 소외됐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벤처기업도 조명을 받았다. 3분기까지 전체 벤처투자 금액은 소폭 감소했지만 ICT 제조, 전기·기계·장비, 화학·소재 등 제조 벤처 분야는 각각 30~50%가량 투자 규모가 늘었다. 투자를 통한 성장의 길이 열리자 에스엠랩(2차전지 양극재), 뉴로메카(협동로봇) 등 해당 분야 교수들이 창업한 기업이 대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독과점 논란 등 성장통도

올해는 벤처기업과 벤처투자자가 국가 경제를 이끌어가는 중심축으로 부상한 기념비적인 한 해라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쿠팡, 무신사, 마켓컬리 등 커머스 유니콘기업의 행보는 유통산업의 표준을 새롭게 쓰고 있다. 디지털전환 수요를 뒷받침하는 클라우드 스타트업의 약진도 자극했다.

성장이 남긴 고민거리도 적지 않다. 기존 산업의 틀을 깨고 플랫폼을 선점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벤처기업의 혁신이 독과점과 규제 회피 등의 문제로 이어지면서 사회 곳곳에서 갈등의 불씨가 번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승합차 호출 서비스 ‘타다’를 둘러싸고 벌어진 택시업계와 벤처기업 간의 갈등이나 딜리버리히어로의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인수 조건으로 이들이 운영 중인 요기요를 매각할 것을 요구한 공정거래위원회의 결정은 독과점 기업의 탄생을 전제로 하는 플랫폼산업을 사회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남겼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