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은 세계 정치사에서 특별한 해였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여부를 묻는 영국민들의 투표가 6월23일 시행됐으며 5개월 뒤인 11월8일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후보가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물리치고 미국의 4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정치 빅뱅’ 두 가지가 일어나면서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둘러싸고 정치학자들의 논쟁이 뜨거워졌다.

《역사의 종언》 저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미국 스탠퍼드대)가 이 같은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21세기 글로벌 정치에서 엿보이는 현상을 해석한 《아이덴티티(Identity)》(정체성·존엄의 욕구와 분노의 정치, fsg북스)가 미국 서점가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책마을] 존중받고 싶은 사람들…'분노의 정치'를 표출하다
일반적인 해석은 세계화와 탈(脫)제조업 흐름으로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유권자들이 이 같은 정치적 이변을 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쿠야마는 미국과 영국에서 계속 논란이 돼온 ‘이민 문제’에 주목한다. 이민자들이 기존의 근로자들을 쫓아내고 오랫동안 형성돼 있는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파괴한다는 여론이 형성돼 있다. 그는 이 같은 아이덴티티를 지키려는 유권자들의 심리와 이들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변화를 이 책에서 살피고 있다.

그는 먼저 20세기와 21세기의 정치적 지형을 비교한다. 20세기 정치는 경제 이슈를 중심으로 이념적 지향이 갈렸다. 좌파는 더욱 확실한 평등을 요구한 반면 우파는 더 많은 자유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이념의 스펙트럼은 달라졌다. 좌파는 경제적 불평등보다 이민자나 성적소수자(LGBT) 등 소외된 계층의 권익을 늘리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우파들은 이와는 결이 다른 애국주의를 강조하고 나섰다. 이들은 인종과 민족, 종교 등에서 동질감을 찾았다. 후쿠야마는 최근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좌·우파들의 공통된 정치 성향은 바로 ‘아이덴티티의 재설정’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최근 20년 동안 지구촌 유권자들을 자극한 것은 불평등 심화에 따른 ‘분노의 정치’였다고 본다. 대다수 정치인은 집단의 품위와 존엄이 굴욕을 당하고 폄하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그들의 유권자에게 호소했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2017년 선거에서 “국가를 되찾고 자부심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내세운다. 트럼프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미국을 다시 강하게’라는 모토로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안(대서양과 태평양)의 엘리트들이 무시하는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장지대) 사람들에게 굳건히 맞설 것을 주문했다.

후쿠야마는 이 같은 정치 현상을 낳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천착한다. 존엄의 본질은 항상 변화해왔다. 소크라테스는 공공을 위해 전투에 나가는 용기 있는 전사들에게 붙이는 찬사가 존엄이라고 했다. 칸트는 공동의 선을 행할 때 인간의 존엄성이 생긴다고 했다. 근세에 들면서 인간 내면의 가치에 기반을 둔 게 자존심이자 존엄이란 설명이 보태졌다. 후쿠야마는 인간 내면에서 드러나는 존엄의 가치는 외부의 인정까지 요구했다고 해석한다. 다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평가해주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 이상으로 중요해졌다.

이처럼 개인의 존엄을 집단적으로 인정받으려는 갈망에서 터져 나온 게 프랑스대혁명이라고 후쿠야마는 주장한다. 이 같은 ‘집단의 존엄’이 아이덴티티로 발전한다. 아이덴티티는 결국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의 외부적인 표출이며, 존엄성의 진화로 이해된다.

아이덴티티의 표출은 분노를 만들고, 포퓰리즘적인 현대 정치를 형성해 나간다는 게 후쿠야마의 시각이다.

그렇다면 이런 아이덴티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는 미국 사회의 경우 법치주의, 인권, 평등과 같은 실질적인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같이 사회적으로 폭넓게 공유된 정체성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력을 북돋워 주는 게 정책입안자들의 역할이라고 역설한다. 또 자유민주주의는 이민을 통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확충된 만큼 이민자들을 미국 사회에 수용할 수 있는 시민 교육이 필요하며, 시민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문호 개방이 넓게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덴티티는 결코 현대 사회를 분리하고 구분짓는 도구만이 아니다. 민주적 가치를 키우고 통합된 사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도구로도 작용할 수 있다.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결국 정치가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게 후쿠야마 교수의 결론이다.

오춘호 선임기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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