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알트만 감독(77)은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쳐온 거장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야전병원을 무대로 미국사회를 풍자한 블랙코미디 '매쉬', 컨트리 음악의 본고장을 탐구한 '내슈빌', 할리우드 사람들의 속물성을 드러낸 '플레이어' 등에서 분방한 상상력으로 삶의 진실을 드러냈다. 그의 신작 '고스포드파크'는 20세기초 영국인들의 위선과 탐욕을 살인사건을 기둥으로 풀어낸 스릴러다. 당대 사회와 문화, 인간에 대한 풍자가 품격 높은 추리물로 승화됨으로써 올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다. 영국배우들의 잘 훈련된 연기, 시대상을 정교하게 재현한 세트와 의상도 돋보인다. 1932년 11월 영국의 장원 고스포드파크에서 열리는 사냥파티에 맥코들경(마이클 갬본)과 그의 부인 실비아(크리스틴 스콧 토머스)가 친지들을 맞이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트렌담 백작부인(매기 스미스)과 하녀 메리(켈리 맥도날드), 윌슨 부인(헬렌 미렌)과 할리우드의 프로듀서 모리스 와이즈만(봅 발라반) 등 미국과 영국의 상류층 인사들과 하인들이 장원을 찾는다. 이 집의 하녀장 엘시(에밀리 왓슨), 집사 제닝스(알란 베이츠), 요리사 크로프트 부인(아일린 애킨스) 등을 포함한 사람들로 넘쳐나고 축제분위기가 무르 익는다. 그러나 주인 맥코들경이 돌연 살해되면서 분위기는 급반전된다. 카메라는 수많은 인물들에게 고루 시선을 던지며 용의선상에 올려 놓는다. 실비아의 두 자매와 그들의 남편, 한 젊은 커플 등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상류층이지만 예상보다 훨씬 가난하며, 맥코들경과 금전 거래관계가 있다. 닫힌 공간에서 자행된 살인, 범인이 피해자 주변인물이라는 점 등에서 영국의 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크리스티 작품의 '포와로'같은 수사관이 사건을 해결하는게 아니라 하녀 메리가 문제를 풀어내는 점이 이채롭다. 범인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해 단죄의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관객들이 퍼즐을 풀도록 구성돼 있다. 이 영화에서 미스터리 요소를 빼낸다 해도 드라마로서 손색이 없다. 상류와 하류로 이분화된 계급구조, 사회제도와 상관없는 인간의 본능 등이 예각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상류인물들은 이기심과 탐욕, 기만으로 뭉쳐 있다. 그들은 틈만 나면 배우자를 속이고 다른 상대를 향해 욕망의 눈길을 던진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아래층 하인들의 감시망에 걸린다. 하인들도 주인들과 마찬가지로 거짓 투성이며 상류층 못지 않게 계급질서가 철저하다. 하인들은 주인의 성으로 불리며 주인의 계급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다. 이들은 오히려 주인보다 더 영리하고 잘 생겼다. 윗층과 아래층 사람들은 언뜻 왕래하지 않는 듯 싶다. 그러나 이들은 섹스를 매개로 은밀하게 결탁한다. 맥코들경의 죽음도 그 관계가 수면위로 불거지면서 초래된 것이다. 치밀한 스토리라인을 갖췄지만 이 영화는 후반부의 서스펜스가 느슨하다는 흠이 있다. 지나치게 많은 인물과 에피소드를 추적하느라 시선이 분산된 탓이다. 4월12일 개봉. 15세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