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가 지급 보증 약속했던
2050억 규모 '레고랜드 ABCP'
중도개발공사 회생 신청으로
차환 불가능…이달초 최종 부도
가뜩이나 냉각된 시장에 '폭탄'
CP 시장 전반으로 불신 확산
"최문순 前지사 사업 반대 위한
정치적 결정 아니냐" 시장 부글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 시장이 혼돈에 빠지면서 사태를 촉발한 강원도를 향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강원도는 다음달 예산을 편성하고 내년 1월 말까지 빚을 전액 상환하겠다고 나섰지만, 시장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다. 금리 인상과 인플레이션, 부동산 시장 침체 등 악재가 겹친 상황에서 한 지방자치단체의 ‘오판’이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일으켰다는 지적이 나온다.
○12년 끌던 애물단지, 혈세 먹는 하마로
이번 사태의 중심에 있는 레고랜드는 개발부터 완공 이후까지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2010년 11월 개발 계획을 공개한 이후 지난 5월 정식 개장까지 12년이 걸렸다. 총 5270억원을 투입해 춘천시 중도동 하중도 일대 28만㎡에 테마파크를 건설하는 사업으로, 아시아권의 첫 번째 레고랜드로 기대를 모았다.
강원도는 2011년 9월 최문순 강원지사가 취임한 직후 세계 2위 엔터테인먼트그룹인 영국 멀린과 레고랜드 투자합의각서를 체결했다. 100년간 시유지를 무상임대하는 파격적인 조건도 제시됐다. 도는 2012년 레고랜드 개발 시행사로 엘엘개발을 설립하고, 지분 44%를 출자했다. 엘엘개발은 특수목적법인(SPC) ‘KIS춘천개발유동화주식회사’를 통해 2050억원 규모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발행해 공사 대금을 조달했다. 도가 보증을 선 덕분에 ABCP는 최고 신용등급(A1)을 받았다.
레고랜드는 2014년 첫 삽을 뜨자마자 현장에서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중단 위기를 맞았다. 건설 계획 변경으로 공사가 지연되고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재정난에 시달리던 강원도는 2018년 사업시행주체를 멀린에 넘겼다. 이 과정에서 엘엘개발은 강원중도개발공사(GJC)로 회사명을 바꿨고, GJC는 SPC ‘아이원제일차’를 통해 2050억원 규모의 ABCP를 재발행했다. 기존 발행 주관사였던 한국투자증권은 비엔케이투자증권으로 바뀌었다. 사업성 논란이 제기됐음에도 한국신용평가와 서울신용평가는 도의 지급 보증을 믿고 해당 ABCP에 A1 등급을 매겼다.
○정치 이슈가 시장 불신으로 번져
레고랜드는 일곱 번 개장 시기를 미룬 끝에 지난 5월 문을 열었다. 문제는 7월 김진태 강원지사(사진)가 취임한 이후 벌어졌다. 김 지사는 지난달 28일 “레고랜드의 빚보증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원에 GJC의 회생 신청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법정 관리인이 공사 자산을 매각하도록 해 대출금을 갚겠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김 지사가 전임자인 최 전 지사의 치적 사업을 지우기 위해 강수를 뒀다는 해석이 나왔다.
GJC의 회생 신청으로 ABCP는 차환 발행이 불가능해졌고, 신용평가사들은 신용등급을 A등급에서 C등급으로 강등했다. 지자체가 보증한 ABCP가 지급 불능에 빠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가 지급 보증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지난 5일 아이원제일차가 발행한 2050억원의 ABCP는 최종 부도 처리됐다.
최고 신용등급을 받은 ABCP의 부도 소식은 시장 전반에 불신을 퍼뜨렸다. 기업어음(CP)과 자산담보부단기채(ABSTB) 차환 금리가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로 치솟았고,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들은 손실을 막기 위해 채권 매각에 나서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분양이 끝난 우량 사업장도 ‘AB’자만 붙으면 안 팔리는 실정”이라며 “가뜩이나 살얼음판이던 시장에 레고랜드 사태가 기름을 끼얹으면서 부동산 관련 유동화물뿐만 아니라 채권시장 전반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태가 커지자 김 지사는 21일 기자회견을 열고 기한이익상실(EOD)이 발생한 ABCP 2050억원에 대해 전액 상환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다음달 예산을 편성하고 늦어도 내년 1월 29일까지 상환 계획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GJC에 대한 법원 회생 신청도 동시에 진행한다. 새로운 인수자가 나타나고 매각 대금이 들어오면 만기 전 원금을 상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도의 설명이다.
그러나 채권시장이 단기간에 안정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이미 회사채 시장 전반으로 유동성 위기가 확대됐기 때문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운용사와 기관들이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며 “시장에 신뢰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김 지사도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지는 몰랐겠지만 정치인의 무책임한 판단으로 경제적 피해자만 양산하게 됐다”고 꼬집었다.
강원도 ‘레고랜드발’ 단기자금 경색으로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시장은 우량·비우량을 따지지 않고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울 둔촌주공 재건축 사업의 PF 연장 실패는 유동성 위기가 우량 건설현장에까지 덮친 경우다.21일 업계에 따르면 BNK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SK증권, 부국증권, 키움증권 등은 7000억원 규모의 둔촌주공 PF 유동화 단기채 차환용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발행을 위해 전방위로 제안요청서(RFP)를 보냈지만 끝내 투자자를 찾지 못했다. 금융회사와 연기금은 물론 일반 법인과 사모펀드까지 찾아갔으나 소용없었다는 후문이다. 둔촌주공 재건축 사업은 일반분양 물량만 4700가구에 달해 수익성이 보장된 사업장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투자자들은 “건설사와 증권사의 신용등급은 신뢰할 수 없다. 사업장 수지를 직접 확인하고 추가적인 돌발 위험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며 투자를 꺼린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기존에 발행한 7000억원의 PF 전액을 현대건설(1960억원) HDC현대산업개발(1750억원) 대우건설(1645억원) 롯데건설(1645억원)이 자체 자금으로 갚게 됐다.단기 자금시장 경색은 건설업계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 레고랜드 부도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지방자치단체 보증 민·관 합동 PF 사업이 많은 A, B사에 대해선 부도설까지 나돌고 있다. A1 신용등급 어음만 투자하도록 원칙을 정해 투자했던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와 펀드가 지자체 보증 채권은 더 이상 A1 채권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판단, 급속도로 자금을 회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설사가 직접 시행사 자격으로 지자체 합작법인에 출자한 민·관 합동 사업은 연대보증 사업보다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한 투자기관 관계자는 “군수·시장이 새로 당선돼 돈을 못 갚겠다고 하면 그만”이라며 “사업성을 따져 신용등급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전했다.건설사들은 신규 프로젝트 ‘개점휴업’ 상태로 자금 경색이 풀릴 때까지 버티기에 들어갔다. 총 공사비만 4조3677억원에 달하는 둔촌주공 사업장도 내년 초 일반분양을 할 때까지 건설사의 자체 자금으로 버텨야 할 판이다.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공사 입찰 보증금 수십억~수백억원을 아끼기 위해 재건축·재개발 입찰 참여도 자제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차례로 만기가 돌아오는 건설사 회사채도 부담을 키우고 있다. 부동산 경기 하락 여파로 회사채 차환 발행이 막힌 건설사들은 자체 자금으로 상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으로 발행되는 유동화증권인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 발행 가능성을 타진하는 대기업 계열 건설사도 나오고 있다.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의 후폭풍이 채권시장 전반으로 퍼졌다. 기관투자가의 투자 수요가 쪼그라들면서 기업어음(CP)·회사채를 넘어 AAA급 최상위 신용도를 보유한 공사채마저 미매각이 속출하고 있다. 21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이날 부산교통공사(AAA급)는 500억원어치 공사채 입찰에서 400억원의 주문을 받는 데 그쳐 발행을 포기했다. 한국전력공사(AAA) 채권도 이날 2000억원의 모집 물량을 채우지 못해 발행에 실패했다. 앞서 국가철도공단(AAA급), 한국도로공사(AAA급), 인천교통공사(AAA급) 등도 300억~1500억원의 공사채를 발행하려고 했지만 수요를 채우지 못해 포기했다.일반 기업의 회사채 발행 환경은 더 악화하고 있다. 통영에코파워, 롯데하이마트 등은 시장 상황을 고려해 회사채 발행을 연기했다.이날 채권시장은 금리가 급등하면서 패닉 심리가 확산했다.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전날보다 0.145%포인트 급등한 연 4.495%로 마감했다. 10년 만기 국고채는 0.193%포인트 급등한 연 4.632%에 마감하면서 연중 최고치를 경신했다.장현주/최석철 기자 blacksea@hankyung.com
‘레고랜드 사태’의 후폭풍으로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가 연일 신저가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금리 급등에 이어 프로젝트파이낸싱(PF) 리스크까지 겹친 영향이다.2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람코에너지리츠, ESR켄달스퀘어리츠, SK리츠, NH올원리츠 등 13개 리츠가 52주 신저가를 경신했다. 전체 21개 상장리츠 가운데 61%가 무더기 신저가를 기록한 셈이다.레고랜드 건설을 위해 발행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이 부도 처리되며 파장이 부동산 대출시장으로 번졌고, 투자심리가 급격히 냉각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리츠는 투자자들로부터 모은 자금과 은행 대출을 바탕으로 부동산 자산을 매입해 임대수익과 시세차익을 배당하는 상품이다. 대출 금리가 크게 상승하면 그만큼 배당 매력도 줄어든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3%로 올린 것도 리츠 주가 하락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이경자 삼성증권 연구원은 “레고랜드 ABCP 상환 실패는 부동산 PF 시장 리스크를 확대하며 채권과 부동산 대출 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시중은행이 잇달아 연 5% 금리에 육박하는 예금상품을 내놓는 점도 리츠 투자 매력을 감소시키고 있다. 리츠의 배당수익률은 여전히 연 6~8%로 예금상품보다 높지만, 투자자는 주가 하락으로 나는 손실도 부담해야 한다.대신자산신탁은 연내로 예정됐던 대신글로벌코어리츠 상장을 연기하기로 했다. 한화자산운용도 한화리츠 상장을 미룰 것으로 알려졌다.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