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계 "뒤통수 맞았다", 이의 제기할 틈도 안줘…재입법 외엔 대책 없어

모든 기업의 경영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법이 졸속으로 개정되면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달 1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개정 상법에 신설된 이사의 자기거래 승인대상 확대와 회사기회 유용 금지,준법지원인제 도입 등의 조항이 일반 입법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기업의 경영효율과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이해관계자 및 법률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의견수렴과 심의 절차를 형식적으로 거쳤을 뿐 아니라 법안 숙려기간도 제대로 갖지 않은 채 다른 민생법안들과 함께 전격 처리됐다는 지적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는 물론 법조계 전문가조차 "개정 상법은 일반 법원칙에 맞지 않는 조항이 적지 않고 졸속 통과된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다"며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포함해 법 적용의 혼선을 막기 위한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개정 상법은 시행령 위임사항이 거의 없어 부작용을 줄이려면 재입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주장이다.

상법 개정안은 2008년 10월 정부가 직접 발의했다. 이후 국회에서 숱하게 논의됐지만 개정 조항 등을 놓고 합의점을 찾지 못해 장기 표류하다 3월 임시국회에서 전격 통과됐다.

공정사회 여론에 편승해 대주주들의 의사결정권을 줄이려는 박영선 · 노철래 · 홍재형 의원 등 일부 야당 의원들과 조속한 법제화를 원한 법무부 등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재계 단체 등은 제대로 이의를 제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대기업 관계자는 "이사의 자기거래 승인대상에 주요 주주를 포함시킨 부분은 법무부의 당초 발의안은 물론 과거 토론회와 공청회에서 전혀 논의가 없었는데 갑자기 추가됐다"며 "사전 승인요건이 이사회 3분의 2 동의로 강화된 것도 원래 정부안이 아니라 야당안이었다"고 말했다.

전경련과 대한상의 등 경제단체들은 상법 개정안 처리에 안일하게 대응했다는 지적에 '우리도 뒤통수를 맞았다'고 항변하고 있다. 3월 임시국회에서 다른 민생법안들에 파묻혀 함께 처리될 줄 몰랐다는 얘기다. 법무부는 개정안에 대해 경제단체들이 정확한 의견을 내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상법 소관 국회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가 법안 숙려기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사위는 최근 다른 상임위에 시급한 민생법안 등이 아닌 경우 법안 숙려기간인 5일을 넘지 않으면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정작 법사위는 3월8일 법안심사소위에 개정안을 상정한 뒤 10일 전격 처리했고 11일엔 본회의를 통과했다.


(2) 1원짜리 거래도 승인 필요, 현대차 이사 가족이 그랜저 살 때도 이사회 거쳐야

현행 상법은 이사회 승인대상 거래로 이사 본인과 그가 대표로 있는 회사와의 거래로 한정했으나 개정 상법은 범위를 대폭 넓혔다. 회사 오너와 사외이사를 포함한 등기이사,그 부인과 친인척,처가 직계존비속,이들이 경영하는 회사,10% 이상의 주식을 보유한 주요 주주 등도 거래에 앞서 이사회 3분의 2 이상 승인을 받아야 한다.

재계에서는 1원 이상의 모든 거래에 대해 사전승인이 필요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개정 상법이 승인대상 거래 규모나 거래 특성을 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직영 영업소에서 이사의 친인척은 물론 관계회사 등에 자동차를 판매하기 앞서 매번 이사회 승인이 필요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개정 상법은 보완책으로 화상전화 등 원격통신수단에 의한 이사회 결의를 허용키로 했지만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미지수다.

전경련 관계자는 "일상적인 소액거래는 일반적으로 부서별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회사에서 어떻게 일일이 이사회를 열어 결정하느냐"며 "엄청난 혼선이 빚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경영 시너지 효과를 높이기 위해 수직 계열화를 이룬 대기업들로서는 이사회 개최가 어려워 계열사 간 거래의 연속성이 떨어지면서 경영 효율성이 저하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사회는 소집 통지일로부터 1주일 뒤에 개최할 수 있지만,이사회 일정 차질로 거래승인이 나지 않으면 부품공급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전자회사들만 하더라도 LED와 디스플레이,핵심 전자부품 등을 계열회사에서 공급받으며 소재-부품-완제품 제조가 수직계열화돼 있다.

(3) 동반성장·신사업 진출 '발목', 협력사에 기술 이전할 경우 연대배상 책임

신설된 사업기회 유용 금지는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사업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사회 3분의 2 이상 승인 없이는 현재 또는 장래에 회사의 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기회를 포기할 수 없도록 한 이 규정은 대기업이 보유한 휴면특허를 협력업체 등에 이전할 때 걸림돌이 된다.

거래 상대방이 장래에 이득을 보면,결과적으로 회사에 그만큼 손실을 끼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사들은 연대배상의 책임을 져야 할 수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설령 회사의 사업기회를 제3자에게 제공한 것이 아니라 경영전략상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이사회 결의의 책임 때문에 보수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외이사가 과반수인 대기업들로서는 이사회 승인을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선량한 관리자로서 충실의무를 지는 이사회가 회사의 사업기회를 제3자에게 제공하는 안건을 승인하는 것 자체가 법리적으로 모순이라는 지적도 법조계에서 나온다.

기업들의 미래성장동력 확보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신사업 진출을 위한 합작투자 등을 크게 제약할 수 있다는 우려다. 2009년 삼성SDI와 보쉬가 합작으로 전자자동차용 2차 전지 생산을 위해 SB리모티브를 설립한 데서 보듯 대기업들의 신사업 합작투자가 잇따르고 있지만,개정 상법의 사업기회 유용금지 조항을 적용하면 회사의 사업기회를 신설회사 또는 제3자에게 넘긴 것이 된다.

기업분할 등을 통한 구조조정이나 사업합리화도 힘들어질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전경련 관계자는 "회사기회의 개념이 포괄적이기 때문에 자칫 소송이 남발되는 등 경영상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수언 기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