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대한유화는 물론 제외한 얘기입니다만 지금 공장
증설에 나서지 않는 회사가 어디 있습니까"

D사 경영기획팀장의 말처럼 유화업계는 너도나도 공장증설에 매달려 있다.

"9월고비설"로 아킬레스건을 자극해도 시설확충작업의 깃발이 내려갈
조짐은 아직없다.

최상류(업 스트림)에 있는 나프타분해공장(NCC)부터가 그렇다.

행정규제를 피하기위해 개보수를 표면에 내세워 야금 야금 시설능력을
키우고 있다.

유화공업협회 조사도 이를 반증한다.

최근에 집계된 이 조사는 크고 작은 건을 모두 합해 금년중 48건의 공장
신.증설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돼있다.

여기에 들어가는 투자소요액은 3조8천억원.

"투자전쟁"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사장은 설비투자와 인사만 잘하면 된다"는 얘기가 있지만 "현재 한국에서
인사는 별로 중요지 않다"(H사기획부장).

장치산업이어서 사람이 적기 때문이 아니다.

"사장은 남보다 설비투자만 잘 하면 된다"가 아니라 "설비투자만 선수를
치면된다"(K유화 김사장) 할 정도로 유화업계가 투자전쟁에 휩싸여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유화업계는 왜 투자전쟁을 통한 "팽창주의"노선을 택하고
있는가.

우선 한주기의 불경기가 끝나면서 경영마인드가 낙관론으로 완전히
돌아섰기 때문이다.

석유화학 사이클상 지난 90년의 대단위 증설에이어 4년만에 찾아온 설비
투자붐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이번 증설붐은 과거의 경험에 따른 "학습효과"라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유화업계에선 실제로 삼성과 현대가 각각 1조원이상을 들여 유화단지를
짓고 불황에 빠졌지만 현재 이들 업체의 투자는 반도체 투자 못지않게
성공을 거둔 결정으로 평가 받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래서 업계엔 투자를 게을리하면 언젠가 후회할 날이 올것이라는 사고가
팽배해 있다고나 할까.

유화산업의 특성도 투자전쟁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수직계열화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업계의 "상식"이 증설을 부추기고
있다.

괜히 선수를 빼앗겨 히든 카드를 사용할 기회를 영영 만나지 못할수도
있다.

불운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만 도박은 한번 해볼 필요가 있다는 심리가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LG화학의 PVC생산 수직계열화투자도 이같은 상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삼성종합화학의 TPA(테레프탈산) 원료공장건설도 마찬가지다.

투자전쟁의 발발은 대기업그룹을 중심으로 실탄(자금)여유가 생긴데도
원인이 있다.

"경기전망이 아무리 밝아도 돈이 없으면 공장증설을 못하는 겁니다"(대림
산업의 장진양상무)

최근 1~2년의 호경기로 돈 여유가 생겼으니 경기하강기미가 보여도 일단
공장을 짓고 보자는 것이다.

여유가 있을때 설비를 확충해 다음번 호황에 대비하겠다는 속셈이다.

장기적인 성장방향만 설정됐다면 "무한투자"로 밀어부치는 오너가 있는
한국 재계의 속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유화업계의 설비투자는 그 자체를 투자전쟁에
비유하는 것처럼 내재된 문제점도 적지 않다.

"자신있는 종목을 특화하는 전략을 펴지않고 마구잡이식의 증설은 이제
먹혀들기 힘들 것입니다"(황선두 상성종 상성종합화학사장)

황사장은 주특기를 살리지 않는 마구잡이식의 증설은 경제개발속도가 빠른
후진국에선 모르지만 한국에선 그런 시절이 지나갔다고 강조한다.

LG화학의 K사업팀장은 각사가 진출하려는 방향이 너무 많이 중복돼 있는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LG와 한화가 특화해온 PVC에 현대가 내민 도전장을 그 예로 들었다.

이렇게 보면 올들어 일어난 유화업계의 투자전쟁 내지 팽창주의는 앞으로
그들이 벌일 시장셰어경쟁과정에서 태어날 제2의 대한유화를 잉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양홍모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