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3·25일 <베자르 발레 로잔 with 김기민>
가장 취약했던 오른팔로 리듬을 깨웠다
5개월 공백 깬 발레 황제의 저력
지난 25일 서울 역삼동 GS아트센터. 지난해 11월 오른쪽 어깨 부상 소식과 함께 무대를 잠시 떠났던 마린스키 발레단의 한국인 수석무용수 김기민(34)이 고국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베자르 발레 로잔(BBL) 내한 공연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주목받았던 '볼레로'를 통해서다. '라 멜로디(선율)'로 우뚝 선 그는, BBL의 상징인 붉은 제단 위에서 완벽한 부활을 보여줬다.
ⓒYOON6PHOTO,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이번 무대는 김기민이 한국인 무용수로는 최초로 오리지널 버전의 ‘볼레로’ 주역으로 낙점됐다는 점에서 이미 공연 전부터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 마린스키 발레단의 쉼 없는 공연 일정 탓에 그간 성사되기 어려웠던 역사적 만남은, 아이러니하게도 어깨 부상으로 얻은 시간 덕분에 가능했다. 그는 직접 로잔으로 건너가 세 차례나 오리지널 안무를 몸에 익히는 집념을 보였고 마침내 BBL의 상징인 ‘붉은 제단’ 위에서 완벽한 부활을 보여줬다.
김기민의 첫 몸짓은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볼레로>(2025)에서 라벨이 고통스럽게 첫 음을 찾아내던 산고의 순간과 겹쳤다. 이번 무대에서 김기민이 스네어 드럼의 첫 리듬을 받아낸 것이 바로 그를 고통받게 했던 오른쪽 어깨였기 때문. 허공을 향해 높이 치켜든 오른손이 리듬을 타고 서서히 내려오는 순간, 객석은 숨을 죽였다. 재활을 견뎌낸 육체는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세밀해졌다. "오히려 몸 상태가 좋아졌다"던 그의 자신감은 첫 리듬을 움켜쥐는 정교한 손끝에서 그대로 증명됐다.
무대 중앙의 높은 원형 테이블, 이 '제단'이라는 설정 덕분에 관객은 어느 좌석에서도 김기민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고립된 공간에서 자신만의 싸움을 이어갔다. 영화 속 라벨이 방안에 갇혀 악보와 사투를 벌였듯, 김기민은 제단 위에서 자신의 육체를 바쳤다. 한 인간이 시련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그 무대 위에 있는 듯 보였다.
ⓒYOON6PHOTO,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무용사적으로 베자르의 '볼레로'는 발레를 보는 예술에서 다 함께 경험하는 제의로 격상시킨 전환점이다. 1961년 초연 당시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는 클래식 발레의 우아한 서사를 지우고 오직 인간의 원초적 에너지와 관능만을 남겨두길 원했다.
특히 주인공 '라 멜로디'는 단순한 무용수가 아닌 신과 인간을 잇는 사제(司祭)로 은유한다. '라 멜로디'는 조르주 돈(Jorge Donn), 실비 기옘(Sylvie Guillem) 등 무용계의 전설들에게만 허락됐다. 따라서 이 자리에 선다는 것은 당대 최고의 기량과 카리스마를 지닌 시대의 무용수라는 걸 증명하는 일이다.
본래 여성 무용수를 위해 안무되었던 이 역할은 조르주 돈 이후 남성 무용수들에게도 문을 열었다. 이는 '라 멜로디'가 생물학적 성별을 넘어 인간 본연의 생명력과 우주적 기운을 형상화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김기민이 보여준 이번 무대는 바로 그 전설들의 계보를 잇는 동시에, 마린스키에서 다져온 정통 클래식의 절제미를 베자르 특유의 야성적 생명력과 결합한 것이었다. 클래식 발레의 절제를 부수고 본능의 해방을 완벽하게 실현해낸 순간이었다.
ⓒYOON6PHOTO,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음악사적 관점에서도 그의 춤은 경이로웠다. 라벨은 자신의 음악 '볼레로'가 일정한 템포로 17분간 견고히 이어지길 바라며 "절대 서두르지 말라"는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남겼다. 김기민은 집요한 스네어 드럼 소리에 맞춰 자신의 호흡과 근육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절정에 이르기 전까지 에너지를 전략적으로 분배했다.
마지막 2~3분. 음악과 혼연일체가 되어 허공을 앞뒤로 가르는 그의 양팔은 라벨의 고집과 무용수의 투혼이 만난 전율의 결정체였다. 멜로디의 전개가 아닌 음색의 확장으로 절정을 향하는 라벨의 설계는 김기민의 몸을 통해 입체적으로 시각화됐다. 제의를 마친 그에게 쏟아진 환호는 한 천재 무용수의 재기만이 아닌 시련을 통과한 예술가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에 대한 경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