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공단이 이재명 정부의 ‘주주가치 제고’ 기조에 발맞춰 실력 행사에 나섰다. 정기 주주총회에서 기업가치 훼손 우려가 있는 안건에는 제동을 걸고, 소수 주주 보호와 지배구조 개선 안건에는 힘을 싣기 시작했다.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8~9%를 보유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이 주총 판도를 가르는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적극적 주주로 역할 확대
국민연금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20일 고려아연을 포함해 13개 상장사의 정기 주주총회 안건에 대한 의결권 행사 방향을 발표했다. 경영권 분쟁을 겪는 고려아연의 경우 최윤범 회장 선임 안건에 대해 ‘미행사’를 택하고, 일부 감사위원 후보 안건에는 반대 의견을 내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최 회장 선임 안건과 관련해 국민연금이 사실상 반대 입장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MBK파트너스·영풍 측 손을 들어준 것도 아니다. 이들이 추천한 박병욱 이사 후보 선임 안건에 대해서도 의견을 내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다른 기업의 주총 안건에서도 국민연금의 선별 대응 기조가 확인됐다. 신한금융지주의 진옥동 회장 사내이사 선임 안건과 한솔케미칼의 자사주 보상·처분 안건 등 주주 권익 침해 우려가 있는 사안에는 반대 결정을 내렸다. 과도한 이사 보수 한도와 소수 주주 권리를 약화할 수 있는 정관 변경 안건도 제동을 걸었다. 반면 재무제표 승인과 이사 선임, 정관 변경 등 통상적인 안건 가운데 문제가 크지 않거나 지배구조 개선 성격이 있는 경우에는 대체로 찬성했다. 시장에서는 주주 권익 후퇴와 자사주 활용 왜곡에는 반대하고, 그렇지 않은 안건에는 찬성하는 국민연금의 선별 대응 원칙이 한층 뚜렷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변화는 이재명 대통령과 여권이 주주가치 제고와 기관투자가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독려하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정부와 여당은 자본시장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기관투자가가 배당, 자사주, 지배구조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혀왔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역시 올해 정기 주총부터 상법 개정 취지를 반영해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와 주주활동 강화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징벌적 의결권 행사 우려”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상장사가 270곳 안팎에 달하고, 10% 이상 보유 기업도 수십 곳에 이른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강화가 국내 상장사의 지배구조와 주주 환원 정책 전반을 뒤흔드는 변수로 여겨지는 이유다. 상장사로선 주총 안건을 짜는 단계부터 국민연금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지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배당 확대와 자사주 소각, 이사회 독립성, 소수 주주 보호 장치 등의 이슈를 두고 국민연금으로부터 선제적인 대응을 요구받는 구조가 고착할 가능성도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활동이 정부 정책 기조와 맞물리면서 개별 기업 경영에 대한 과도한 개입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기업 관계자는 “주주가치 제고라는 명분에는 공감하지만, 개별 기업의 특수한 경영 환경을 무시한 채 획일적인 잣대로 징벌적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경영권 침해”라고 지적했다. 주총 시즌마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기준과 독립성을 둘러싼 논쟁이 되풀이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