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션의 연주와 녹음부터 시작해서 믹싱과 마스터링 그리고 이를 유무형의 포맷에 담은 후 재생하는 오디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한 과정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매우 뛰어난 연주가 이후 후반 작업 때문에 저평가받기도 하며 제대로 들려지지 못하고 흙 속에 묻혀버리고 말기도 한다. ‘흙 속의 진주’라는 식으로 재평가받은 작품의 주인공은 운 좋게 재발매되어 재평가의 기적을 이뤄내기도 한다. 종종 방송국은 그 진실을 수많은 아카이브 속에서 발굴해 다음 세대에 생생히 진실을 전해준다.
세계 최초 디지털의 불꽃: 스티브 마커스 ‘Something’(1970)
스티브 마커스 ‘Something’(1970) 앨범 | 필자 제공
스티브 마커스가 이나가키 지로 그리고 소울 미디어가 함께 한 ‘Something’이라는 앨범은 그렇게 흙 속의 진주처럼 이후 세대에서 길어 올려 명반의 지위를 획득했다. 미국의 테너 색소폰 주자 스티브 마커스는 일본 투어 중 이나가키 지로의 초대를 받아 재즈 세션을 함께 하다가 바로 이 앨범 ‘Something’을 녹음했다. 당대 미국과 일본 최고의 재즈 장인들이 만나 번개가 친 듯한 녹음이다. 비틀즈의 ‘Something’은 이렇게 또 한 번 재즈 버전으로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이 앨범은 단지 마니아들이 길어 올린 과거의 명연 정도로 치부하기엔 녹음 자체가 가지는 역사적 무게감을 갖는다. 흥미로운 건 이 앨범 녹음이 1970년임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녹음이라는 사실이다. 사연은 이렇다. 당시 일본 공영 방송국 NHK가 프로토타입으로 만든 PCM 디지털 레코더를 사용해 녹음을 진행했다. 이 시기는 CD라는 디지털 포맷이 나오기 10년도 더 전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LP로 발매되긴 했다. 그러나 이 앨범은 이 녹음 스토리로 인해 세계 최초의 상업적 디지털 녹음 중 하나라는 영예를 얻으며 회자되고 있다. 역시 NHK 같은 거대 방송국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NHK의 PCM 디지털 레코더 | 필자 제공 NHK의 실황 전설: 므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5번’(1973)
예브게니 므라빈스키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갔을 때였다. 무려 1973년의 일로 도쿄 문화회관 홀에 일본의 클래식 팬들이 자리를 빼곡히 메웠다. 그리고 어김없이 NHK 방송국 녹음 팀은 이들의 일본 첫 내한 공연을 방송용으로 녹음했다. 가장 빛나는 녹음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비극적인 행진의 1악장과 깊은 애도의 3악장을 지나 대망의 4악장에서 므라빈스키가 조련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압도적인 카타르시스를 터뜨린다. 악곡이 가진 비극적 아이러니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다.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5번’(1973) 앨범 표지 | 출처. 한경DB
당시 녹음은 NHK 아카이브에 고이 모셔져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Altus라는 레이블을 통해 재발매된다. 실황 녹음이기에 스튜디오 녹음 같은 선명함은 덜하지만 1973년이라는 시대를 감안하면 엄청난 다이내믹스가 몰아친다. 당시 일본에선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온전하게 보존된 마스터 테이프 덕분에 이 공연 실황은 일반 레드북 CD는 물론 HQCD, SACD 등으로 발매되었다. DSD 마스터링을 거치는 등 섬세하게 매만진 사운드는 지금 다시 꺼내 들어도 실소를 머금게 한다.
프라하에서의 뜨거운 순간: 자클린 뒤 프레 ‘엘가 첼로 협주곡’(1967)
1967년 체코 프라하에선 자클린 뒤 프레와 함께 존 바비롤리 경이 이끄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섰다. 정확히는 1월 3일, 자클린 뒤 프레는 엘가 첼로 협주곡을 이렇게 뜨겁게 연주한 녹음이 있을까? 자클린 뒤 프레가 병을 얻기 한참 전 젊은 시절의 싱싱한 연주가 뜨겁게 프라하를 물들였다. 스튜디오 녹음도 훌륭하지만 이 라이브 녹음은 그 열기 하나 만큼에서는 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에 버금간다. 그리고 그의 멘토이자 스승과 같은 존 바비롤리는 그녀의 연주를 벗 삼아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힘차게 지휘했다. 녹음 또한 BBC 방송국 엔지니어가 진행했다. 이후 이 녹음은 BBC 아카이브에서 꺼내어져 테스타먼트 레코드에서 정식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자클린 뒤 프레 ‘엘가 첼로 협주곡’(1967) 앨범 표지 / 출처. Amazon.com
BBC가 만든 모니터의 혁명
방송국은 녹음과 아카이브를 넘어 음악 산업 전체를 움직였다. NHK가 디지털의 문을 열었다면 BBC는 녹음 현장의 모니터링 도구까지 직접 설계하기도 했다. BBC는 1970년대 초 엔지니어링 부서에서 LS3/5A라는 모니터 스피커를 직접 개발했다. 작은 스튜디오나 외부 방송 차량에서 사용할 목적의 스피커가 자체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BBC 내부에서 직접 개발한 후 스피커 제조사에게 라이선스를 주어 제작하게 하면서 모니터 스피커의 발전을 앞당겼다는 사실이다. 로저스, 케프, 하베스, 스펜더, 팔콘, 굿맨 등 우리가 아는 영국 스피커 브랜드는 다름 아닌 BBC였다.
LS3/5A | 필자 제공
현대 하이파이 스피커의 역사에서 BBC 스피커는 대단히 다양한 흐름과 줄기를 형성하며 현재에 도달했다. 대형 하이엔드 브랜드가 주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저변에는 이런 빈티지 설계가 연구, 보완되며 독보적 장르로 살아남고 있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되는 하이파이 시장 저변에 대단히 많은 구루들이 연구해 만든 스피커들이 줄기차게 소개되고 있다. 모두 광대역에 홀로그래픽 음장, 엄청난 다이내믹 레인지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며 BBC 스피커 리바이벌은 그 명백한 증거 중 하나다.
이 외에도 BBC가 연구, 개발해 당시 라이선스를 주었던 스피커 규격은 스피커 역사를 몇 단계고 발전시켰고 현재도 빈티지 오디오 마니아들의 감성을 흔들어놓고 있다. 그만큼 여러 메이커들이 현재도 당시 BBC 모니터 규격을 연구, 수정해 새롭게 부활시키고 있다. 그레이엄오디오, 챠트웰, 팔콘 어쿠스틱 등이 대표적이다. 사실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면 케프 LS50도 레이몬드 쿠크의 LS3/5A로부터 영감을 받은 스피커다.
시대를 넘어 부활한 유산
당시 BBC 모니터 스피커를 만들어내며 브리티시 스피커의 스타로 불렸던 메이커 중 많은 수가 지금도 건재하다. 예를 들어 더들리 헤어우드의 하베스나 레이몬드 쿠크의 케프, 스펜서 휴즈의 스펜더 등이 여전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물론 세월의 흐름과 함께 창립자는 작고했고 그 후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와피데일의 가정용 하이파이에 대한 연구와 어쿠스틱 리서치의 충격적인 북셀프 출현을 넘어 BBC 모니터가 일으킨 하이파이 스피커의 변천은 대단한 것이었다.
케프(KEF)의 창립자 레이몬드 쿠크 | 필자 제공
여타 메이커들이 카본, 베릴륨, 아큐톤과 다이아몬드 또는 그 외 신소재를 통해 더 빠른 반응과 더 환상적인 홀로그래픽 음장을 연구하는 동안에도 이들은 고집스럽게 본질을 고집해오고 있다. 황금기 슈퍼밴드가 다시 무대에 서는 듯한 장면이다. 시대를 견디고 세대를 건너 여전히 팬들의 헌사를 끊이지 않고 젊은 팬들까지 아울러 헌사를 받는 모습. 방송국이라는 진짜 히어로가 없었다면 이 모든 유산도 지금처럼 빛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