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지리'라는 오래된 힘이 다시 세계를 흔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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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는 운명이다
이언 모리스 지음 / 임정관 옮김
글항아리 / 836쪽│4만9000원
브렉시트, 갑작스런 '사고' 아냐
'섬나라 영국'이 1만년간 겪은
장기적 갈등이 잉태한 결과
국가 운명은 '지리'와 '선택'의 함수
이언 모리스 지음 / 임정관 옮김
글항아리 / 836쪽│4만9000원
브렉시트, 갑작스런 '사고' 아냐
'섬나라 영국'이 1만년간 겪은
장기적 갈등이 잉태한 결과
국가 운명은 '지리'와 '선택'의 함수
저자는 영국이라는 섬을 이해하기 위해 세 장의 지도를 불러낸다. 먼저 기원전 6000년부터 1497년까지 7500년 동안의 세계관을 담은 ‘헤리퍼드 지도’는 영국을 유럽 변방의 끝자락에 뒀다. 이 시기 유물들을 보면 농경·금속·종교·정부 조직 등 문명적 변혁이 가장 늦게 도달하던 곳이 바로 영국이었다. 바이킹의 침입, 로마가톨릭의 유입, 로마 제국의 흥망은 무덤과 동전, 저택의 양식을 바꾸며 영국을 ‘유럽의 일부’로 붙들었다. 바다는 여전히 장벽이었다.
전후부터 2103년까지를 설명하는 세 번째 지도는 ‘부의 지도’다. 전신, 석유 엔진, 제트기, 위성, 인터넷이 지구를 하나의 시장으로 엮으며 바다는 더 이상 방벽이 되지 못했다. 정보와 미사일은 거리 개념을 무력화했고, 세계의 중심축은 대서양에서 동아시아로 기울기 시작했다. 영국은 미국 유럽연합 중국 사이에서 자리 잡기를 고민해야 하는 주변국으로 밀려났다. 모리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브렉시트를 읽는다. 많은 영국인이 ‘제국의 시대’를 기본값처럼 기억한 채 선택을 내렸고, 세계 질서가 이미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현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리가 인간의 선택을 결정한다는 단선적 결정론을 경계한다. 오히려 인간이 만든 조직과 기술이 지리의 활약 무대를 확대하거나 축소하며, 인간은 그 변화에 반응해 새로운 기회를 만들거나 놓쳐왔다고 말한다. 이런 설명을 뒷받침하는 것은 고고학 자료와 기록 문헌이다. 저택 크기, 무덤 양식, 건축 붐 같은 구체적 증거가 영국사와 세계사의 장기 흐름을 촘촘히 연결한다.
책의 마지막은 다시 ‘거대사의 망원경을 반대로 돌려’ 영국 중부 도시 스토크온트렌트로 향한다. 주민의 70%가 브렉시트 찬성표를 던진 곳이자 모리스의 고향이다. 저자는 수십 년 만에 고향을 걸으며 주민의 대화를 엿듣는다. 그들의 화제는 유럽연합도, 금융위기도, 세계화도 아니다. 잃어버린 열쇠, 아이의 기침, 중고차 이야기로 채워진 일상이다. 그 뒤편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새겨진 작은 도자기 잔이 세계 질서의 움직임을 은연중에 증언한다. 책은 브렉시트라는 단일 사건을 넘어서 세계화 시대의 국가 정체성과 선택을 다루고 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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