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호의 통섭의 경영학] '승률 94.4%' 안세영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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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많은 이들이 안세영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게 된 순간은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단식 결승전일 것이다. 중국의 강호 천위페이와 맞선 경기, 1세트 도중 그녀는 갑작스러운 무릎 통증으로 코트에 쓰러졌다. 표정은 일그러졌고,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다. 점프는커녕, 제대로 디디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기권해도 돼!”라고 외쳤다. 그 말속에는 이미 충분히 잘했다는 위로와 더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절절한 마음이 함께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 대부분의 사람은 경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감싼 손을 떼고 다시 라켓을 들었다. 이후의 플레이는 우리가 익히 알던 완성형 선수의 전형적인 장면들과는 조금 달랐다. 화려한 스매시 대신 차분한 스트로크, 무리한 추격 대신 상대의 빈틈을 읽는 시선, 감정의 폭발 대신 호흡을 고르는 침착함. 기술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던 것은 스스로를 통제하는 힘이었다.
“다친 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어요. 힘을 빼고, 스트로크 하나하나에 집중했어요” 경기 후 그녀가 남긴 이 말은 단순한 소감이 아니다. 평정은 대개 상황이 좋을 때 쉽게 흉내 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다리가 버텨줄지조차 알 수 없는 결승전 한가운데에서, ‘힘을 빼는 태도’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어떻게 보이면 좋을지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선택하는 것. 그 선택을 반복한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아시안게임 이후의 길은 더 험했다. 진단은 ‘무릎 힘줄 과열’이라는 큰 부상이었고, 그녀의 시즌은 그 자리에서 멈춰야 할 것처럼 보였다. 귀국하자마자 시작된 것은 화려한 축하가 아니라 묵묵한 재활이었다. 아이스팩과 치료 도수, 웨이트와 고통스러운 반복 동작이 일상이 되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선수 본인이다. 코트에 다시 서도 예전만큼 뛰지 못하는 날들, 대회에 나가지만 만족할 수 없는 경기가 이어지는 시간은 사실 팬들이 보는 ‘성적 부진의 시기’보다 훨씬 길고 깊다.
여기에 또 다른 유혹이 겹쳐졌다. 금메달리스트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광고, 방송 출연, 이벤트 제안. 안세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순간, 선수라는 신분 위에 ‘스타’라는 타이틀이 겹쳐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녀는 “메달 하나로 특별한 연예인이 되지 않겠다”며 대부분의 기회를 정중히 거절했다. 이 말은 자신이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기도 했다.
그리고 3개월 뒤, 말레이시아오픈 우승이라는 조용하지만 묵직한 답이 돌아왔다. 화려한 드라마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묵묵히 쌓아 올린 시간에 대한 정직한 보상 같은 우승. 많은 이들이 “기적 같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녀의 입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행운’이라기보다 흔들리지 않고 버틴 날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 모른다. 정상은 한 번 오르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다시 되찾는 것은 더 어렵다. 특히 부상과 유혹, 기대와 압박을 모두 통과한 뒤라면 더욱 그렇다.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그녀가 협회 이슈, 스폰서 문제 등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는 점 또한 눈에 띈다. 경기력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선수도 하나의 노동자이자 한 사람의 시민이다. 안세영은 코트 밖의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안팎이 다른 두 개의 자아로 사는 대신, 선수로서도, 한 사람으로서도 스스로의 기준을 지키려는 태도다.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할 것이 있다고 느낄 때, 침묵보다 진실을 선택하는 책임감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이야기는 스포츠 팬이 아니어도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는다. 삶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고, 계획은 쉽게 어긋난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날이 있고,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 문제들이 갑자기 나를 흔들어놓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보통 더 힘을 주고, 더 버티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스스로를 옥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코트에서 매일 다른 공을 받아내며 살아간다. 어떤 이는 조직에서, 어떤 이는 가정에서, 또 누군가는 스스로와의 싸움 속에서 보이지 않는 랠리를 이어간다. 중요한 것은 공의 속도나 상대의 강함이 아니라 흐트러지는 순간에도 다시 라켓을 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지 않는 일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경영평론가(ijeong13@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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