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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를 올려다보던 아이가 도시의 우듬지를 상상하게 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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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e] 박정민의 열린 공간과 사유들

    '나의 나무'에 관한 이야기

    도쿄 도심에서 만나는 안도 다다오의 공간 :
    오모테산도 힐즈와 21_21 Design Sight

    우리가 그리는 도시의 우듬지는 어떤 모습일까
    어린 시절 기억은 언제나 올려다보는 이미지다.

    기억 속에서 내가 올려다보는 것은 대체로 어머니와 이웃집 아주머니인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적벽돌 대문이 있다. 이 문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용도로 활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그 골목의 모든 집이 그랬다. 그리고 이미지의 가장 위쪽엔 대문 위로 솟아오른 대추나무가 있다.

    마지막 기억에선 더 이상 어른들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그곳에서 26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이미지에는 더 이상 대문 위로 솟아오른 나무가 없다. 그건 그 나무가 10년여에 걸쳐 조금씩 잘리다 결국엔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처음 그 나무에서 열리는 대추는 먹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작고 너무 시큼했다. 그러다 어린아이 무릎까지 눈이 쌓였던, 그다음 해였다. 대추나무가 돌연 가지를 풍성하게 뻗더니, 커다랗고 빨간 대추가 열렸다. 그 대추에서 사과 맛이 났다. 대추도 과일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내가 살던 곳은 다가구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서울 구석에 있는 한 동네였는데 그 나무는 집과 집 사이에 있는 8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도시의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가지가 넘어온다며 이웃집이 항의했다. 해마다 나무의 가지는 조금씩 짧아졌다. 하지만 이웃집은 항의를 멈추지 않았다. 나무는 계속해서 짧아졌지만, 그 항의는 톱이 드르렁거리며 나무의 줄기를 자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톱을 댄 나무에선 냄새가 났다. 결국 나무는 뿌리째 뽑아야 했다.
    이 나무는 왜 잘려야만 했을까? 나의 나무가 아닌 당신의 나무여서?
    (법률상 이웃집으로 넘어간 가지는 그 토지의 소유주에게 귀속된다. 그렇다면 어쩌면 모든 나무는 우리의 나무가 아닐까?)

    그 기억 때문인지 ‘나의 나무’는 살게 될 집을 구할 때 중요한 요소였다. 비록 나의 정원은 없을지라도, 나의 나무로 여길만한 것이 눈에 들어오는 곳에 있어야 했다.

    몇 년 전까지 살았던 집 앞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있었다. 그 나무의 줄기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유독 밝았고, 해가 꺾일 무렵이면 황금빛이 났다. 무용수의 비튼 몸 같았던 그 나무의 몸짓은 얼굴이었다. 산책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얼굴이 보이면 문으로는 쓰이진 않았지만 ‘여기가 집’이라고 말하던 그 대문을 보는 것 같았다.

    역시나 눈이 기형적으로 많이 왔던 그다음 해였다. 봄이 되고 나무가 가지를 뻗자 일련의 부대가 나타나 가지를 모두 베어버렸다. 부대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드르렁거리며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지나간 자리에는 유린당한 나무의 잔해들만 널브러진다. 남아있는 건 조금도 없었다.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새 가지와 잎이 돋아나면 어김없이 나타나 몽땅 베어버렸다. 그래서 민원을 넣었는데 위생을 위한 작업이라는, 그 끝에는 도돌이표뿐인 불협화음의 악보만 연주하다 끝났다.

    그 나무는 나의 나무가 아니었다. 그건 사물이었다. 가로수라는 사물.
    (플라타너스, 양버즘나무는 피부병으로 허옇게 드러난 줄기 때문에 언제나 과도한 가지치기의 대상이 된다.)

    오모테산도 힐즈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오모테산도 힐즈 / 사진. © 박정민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오모테산도 힐즈 / 사진. © 박정민
    오모테산도 힐즈의 첫인상은 평범했다. 하지만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서 이 평범해 보이는 외관에 담긴 의도를 읽고 나면 다르게 보인다.

    먼저 이 오모테산도 힐즈는 재건축 프로젝트다. 재건축 프로젝트라 하면 이전보다 높아지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안도 다다오는 기존 건물의 층고를 높이지 않는 것을 원했다. 이곳의 과거인 도준카이아오야마 아파트와 현재의 오모테산도 힐즈를 잇는 역할을 풍경이 해주길 원했고, 그래서 건물 앞에 있는 가로수, 느티나무보다 높지 않았던 기존 아파트의 높이를 유지한 것이다. 건물은 높아지는 대신에 지하로 30미터를 파고들었다.

    또 하나 특별한 점은 주변의 다른 브랜드 공간들이 특수한 패턴과 반짝이는 소재의 파사드를 지닌 것과 달리 홀로 고요히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오모테산도 힐즈 / 사진. © 박정민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오모테산도 힐즈 / 사진. © 박정민
    이 재건축 프로젝트에서 또 하나의 핵심 제안은 파사드에서 보이는 상업적 요소를 배재한다는 것이었다.

    건축주가 안도 다다오의 디자인을 좋아해서 수월하게 진행된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프로젝트 또한 아파트의 소유주인 여러 조합원과 프로젝트를 조율하며 진행했다고 한다. 그 수많은 의견과 생각들과 조율해 가며 과거와 현재를 풍경으로 잇겠다는 자신의 관점을 유지하며 프로젝트를 완성한 것이다.

    21_21 Design Sight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21_21 Design Sight / 사진. © 박정민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21_21 Design Sight / 사진. © 박정민
    이곳 또한 외부에서 보았을 때는 특별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흔히 보이는 노출 콘크리트 벽을 가진 교외의 카페나 작은 미술관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땅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간 사선이 계속해서 더 깊은 곳으로 무한히 파고들어 가고 있는 형태다.

    이 21_21 디자인 사이트(21_21 Design Sight)는 도심에 있는 나오시마섬의 지추미술관 같다.

    이 건물이 땅속으로 파고들어 간 이유는 단순하다. 기존 공원의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대지 위에서 자신의 몸짓을 과감히 드러내기보다 드러난 것은 사실 지붕일 뿐이고, 대부분의 공간은 땅속에 존재한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21_21 Design Sight / 사진. © 박정민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21_21 Design Sight / 사진. © 박정민
    하지만 대지 아래에 존재하면서도 외부의 빛을 담아내고, 이곳에서 전시와 같은 기능을 담아내고 또 사람들을 담아낸다. 중정에 가면 삼각형의 하늘이 보인다. 그 위로 높은 빌딩의 끄트머리가 보인다. 방문했을 때 전시의 주제가 라멘이어서인지 전시보단 이곳에서 올려다보는 세상이 더 흥미로웠다.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수직적 사고가 강하다. 특히 특정한 대상을 판단하는 척도는 언제나 높이로 형성되어 있다. 아이큐는 높은 것이고, 금자탑은 위로 쌓은 것이다.

    여기에 다른 축을 적용해 볼 수는 없을까? 지성이라는 것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깊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고, 혹은 나를 벗어나 사고할 수 있는, 의식의 지평을 넓히는 방식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크 레비의 한 인터뷰는 마치 그런 종류의 지성을 말하는 것 같다.

    “나는 경계를 믿지 않는다. 특히 문학에서는 더더욱. 어떤 사람들은 벽을 쌓지만, 작가들은 지평선을 그린다.” [출처. JOBS - NOVELIST, 2020]

    그렇게 본다면 언제나 숫자로 세계의 위기를 경고하는 석학보다 길을 걸으며 나무가 말하는 언어를 읽는 사람이 더 큰 지성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물론 나무의 이름을 말한다고 해서 나무를 잘 아는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모든 만물을 내려다보며 명명한 것이다.

    나무를 안다고 말하려면 나무의 몸짓을 읽어야 한다. 왜 그런 모양으로 가지를 뻗었는지, 왜 어떤 나무는 높게 자라고 어떤 나무는 적절히 자라는 것을 선택하는지, 또 왜 거기에 뿌리를 내렸는지 등을 읽어내는 사람이 진정으로 나무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건축가라면 화려한 몸짓과 반짝이는 치장을 한 건물보다 그 거리의 풍경 속으로 자신의 몸짓을 갈무리하고, 높아지려 하기보다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가는 건물을 남기는 건축가가 넓게 확장된 지성의 소유자일 것이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21_21 Design Sight / 사진. © 박정민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21_21 Design Sight / 사진. © 박정민
    안도 다다오는 인터뷰에서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은 영원한 청춘이라 말하곤 한다. 젊을 때 복싱했다는 것과 건축주에게 자신의 관점을 관철하는 고집이 그 젊은 이미지를 강화하지만 이처럼 자신을 뽐내지 않으며 도시의 풍경 속으로 몸짓을 감추는 건축을 여럿 남기는 것을 보면 오히려 더 성숙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런 평범한 외양은 ‘나’라는 존재를 벗어나 도시 전체를 보고 그 확장된 의식의 지평에서 발현된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을 자주 숲에 비유하곤 한다. 빌딩 숲, 콘크리트 숲 하지만 보는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숲을 바라볼 때는 밖에서 전체를 바라본다. 그 숲이 사실은 얼마나 위험한 것을 감추고 있든, 또 우리가 밖에서 바라보는 그 형태와 색이 안에서 보았을 때는 얼마나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밖에서 또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며 평균치로 인식한다. 숲의 복잡한 형태는 하늘과의 경계, 그 숲이 그리는 우듬지로 인식되고, 숲이 가진 모든 색은 그저 포레스트 그린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곳을 볼 때는 주로 안에서 바라본다.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주로 올려다본다. 높은 곳을 올려다보고 높은 곳에 존재하는 것을 우러러본다. 그 높이 솟아오른 건물의 꼭짓점이 만들어내는, 그것들이 그리는 도시의 우듬지를 바라보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저 상상이다. 어린 시절 집 앞의 나무가 서서히 잘리는 것이 안타까웠던, 길가의 가로수를 나의 나무로 여기려던 확장되지 못한 자아를 가진 한 인간의 상상일 뿐이다.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확장된 의식의 지평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사는 도시가 그리는 우듬지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그리는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박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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