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하늘은 밝다가도 갑자기 광풍이 일고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버리기도 한다. 검은 구름 사이를 뚫고 한 줄기 빛이 떨어질 때, 마치 아크로폴리스처럼 언덕 위에 솟은 하얀 대성당은 검은 하늘과 맞서며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 광경은 폭풍이 몰아치듯 격정적으로 시작하여 감미롭고 서정적인 선율로 끝맺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연상하게 한다. 또 어떻게 보면, 고통과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나라로 발전시킨 핀란드 사람들의 혼을 상징하는 듯하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핀란드는 오랜 세월 동안 스웨덴의 통치하에 있었다. 당시 공용어는 핀란드어가 아닌 스웨덴어였고 수도는 스웨덴과 가까운 남서해안의 항구도시 투르쿠(Turku)였다. 그러다가 1809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핀란드를 러시아 제국에 편입했다. 그는 핀란드를 대공국으로 격상하면서 수도를 투르쿠에서 러시아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가까운 곳에 위치한 당시 인구 4천명 밖에 되지 않던 헬싱키로 옮겼다.
그럼, 이 광장을 지키는 듯 한가운데에 세워진 동상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의아스럽게도 핀란드 위인이 아니라 핀란드를 지배한 러시아 제국의 황제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렉산드르 1세의 손자 알렉산드르 2세(1818-1881)이다. 왜 러시아 황제의 동상이 아직도 서있는 것일까?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를 해방하는 등 러시아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했으며 핀란드에 대해서는 핀란드 의회를 인정하고 핀란드어를 스웨덴어와 함께 공용어로 격상해 줄 정도로 유화정책으로 일관한 ‘선한 황제’였다. 하지만 그는 188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를 이어 제위에 오른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통치하던 1884년, 핀란드 대공국 의회는 알렉산드르 2세를 기념하는 동상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공모전에서 선정된 스웨덴계 핀란드 조각가 발터 루네베리(Walter Runeberg 1838–1920)가 제작한 동상은 13년 전에 서거한 알렉산드르 2세의 생일에 맞추어 1894년 4월 29일에 제막되었다.
루네베리는 황제를 영웅적으로 과장하지 않았고 오히려 절제된 제스처와 평화로운 표정을 통해 ‘지배가 아닌 인간적 권위’를 표현했다. 그리고 붉은 화강암으로 된 기단 하부의 네 인물상(법, 평화, 빛, 노동)은 그의 고전주의적 구성력과 도덕적 알레고리 감각을 보여준다.
한편 루네베리는 1850년대 중반 덴마크에서 조각을 공부했고 로마에서 약 10년 동안 활동했는데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을 덴마크의 위대한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Bertel Thorvaldsen 1770-1844)의 작품과 미학이었다. 로마에서 40년 동안 활동했던 토르발센은 신고전주의 조각의 거장으로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카노바와 더불어 19세기 유럽 조각의 두 거봉으로 평가받는다. 토르발센이 이탈리아 고전조각의 이상적 아름다움을 북유럽으로 가져왔다면, 루네베리는 그 전통을 헬싱키의 심장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마침내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상황은 완전히 돌변했다.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 제국은 완전히 몰락하고 러시아의 정세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그 틈을 타서 핀란드는 전격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핀란드가 독립을 쟁취한 다음 민족주의자들은 이 동상을 철거하자고 했다. 사실 알렉산드르 2세가 핀란드에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외세의 지배자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철거되지 않았다. 사실 이 동상은 ‘핀란드 자치시대의 황금기’를 증언하는 기념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022)과 핀란드의 NATO 가입(2023)은 이 동상을 다시 주목하게 했다. 어떤 이들은 러시아의 흔적을 지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수는 여전히 보존하는 쪽을 택했다. 동상 아래에는 우크라이나 평화를 지지하는 문구와 꽃다발이 놓인다. 그러고 보면 이제 알렉산드르 2세 동상은 현재의 목소리를 담는 현장이 된 셈이다.
이처럼 핀란드 사람들은 이 동상을 자기네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이 광장은 외세지배의 흔적을 지우지 않은 채, 그것을 넘어서는 핀란드 사람들의 문화적 성숙도를 엿볼 수 있는 도시공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