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의 매력에 빠져드는 과정에는 몇 단계가 있는 듯하다. 처음 이 도시를 찾았을 때는 여느 여행자들처럼 화려한 야경을 이끌려 매일 저녁 와이탄으로 향했다. 그러다 그곳이 익숙해질 무렵부터 황푸강의 물줄기가 닿는 다른 곳들을 찾아 나섰다. '쉬후이빈장(徐汇滨江)'이라는 지명에서 '웨스트번드(西岸)'라는 문화 브랜드로 거듭난 이곳은 이제 여행객뿐 아니라 상하이 사람들의 일상이 되었다.
쉬후이빈장은 한때 철, 석탄, 모래, 석유가 오가던 산업 수변 공간이었다. 항공기 제조 공장과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 있었고, 운송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관련 산업의 쇠퇴와 함께 이곳의 전성기도 막을 내렸다. 2002년 상하이시가 엑스포를 앞두고 '황푸강 양안 종합개발계획(黄浦江两岸综合开发计划)'을 발표하며 전환점이 찾아왔다. 생산 중심의 공간을 금융, 무역, 문화, 관광, 친환경 주거가 어우러진 현대 서비스업 중심으로 재편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쉬후이구 정부의 주도로 도시 개발이 이루어져 오늘날, 서쪽 부두라는 뜻의 웨스트번드, 중국어로는 ‘시안(西岸)’이 탄생했다.
Gate M 조감도. / 사진 출처. Gate M 위챗 오피셜 계정
Gate M에서 바라본 황푸강. / 사진 출처. Gate M 위챗 오피셜 계정
시멘트 공장을 리모델링한 복합 쇼핑몰 Gate M(西岸梦中心)은 미술관을 찾으러 온 이들이 황푸강을 바라보며 이곳에 조금 더 머물 수 있게 만든다. 1920년대 세워진 상하이 시멘트 공장의 산업 건축 골격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전시와 상업, 휴식과 엔터테인먼트가 어우러지는 도시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거듭났다. 여러 건물로 구성된 Gate M의 배치는 세심하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넉넉한 공간을 두어,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이들도 그 틈 사이로 황푸강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강은 언제나 그곳에 있고, 공간은 그 강을 향해 열려 있는 듯하다.
웨스트번드의 예술 시대
2012년에 ‘웨스트번드 문화 회랑(West Bund Cultural Corridor)’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웨스트번드의 본격적인 예술 시대가 열렸다. 석탄 부두를 개조한 롱미술관(Long Museum/龙美术馆)과 비행기 제조 공장의 격납고를 기반으로 세워진 유즈 뮤지엄(Yuz Museum/余德耀美术馆)이 연이어 문을 열었다. 국제 갤러리들이 모여 제1회 '웨스트번드 아트 페어(West Bund Art Fair)'를 열며 이곳은 상하이의 새로운 예술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웨스트번드에 위치한 주요 미술관. / 사진 출처. Shanghai Westbund 위챗 오피셜 계정
황푸강을 마주하며 강변을 따라 세워진 미술관 가운데, 웨스트번드를 대표하는 곳은 단연 '웨스트번드 뮤지엄'이다. 이곳이 주목받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프랑스 퐁피두 센터와의 장기 협력이고, 둘째는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설계라는 점이다. 치퍼필드는 대지의 형태를 자연스럽게 따르면서도 각 면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카페와 굿즈 샵을 전면에 배치해 전시를 보지 않더라도 누구든 편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지나가는 이들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힌 것도 인상적이다. 미술관은 더 이상 문턱 높은 공간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들어서는 곳이 되었다.
웨스트번드 뮤지엄. / 사진 출처. 웨스트번드 뮤지엄 홈페이지프랑스 퐁피두 센터부터 데이비드 호크니까지
웨스트번드 뮤지엄은 2019년 개관과 동시에 프랑스 퐁피두 센터와 문화 교류 프로젝트로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2025년 퐁피두 센터가 대규모 리모델링을 위해 문을 닫았지만, 오히려 상하이에서 퐁피두 센터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먼저, 첫 번째 5개년 협력(2019~2024) 동안 상설전 3부작 <시간의 형태>(2019~2021), <만물의 소리>(2021~2023), 그리고 <초상의 영상>(2023~2024)을 통해 진행되어,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700여 점이 상하이를 거쳐 갔다.
2025년 웨스트번드 뮤지엄에서 진행 중인 전시. / 사진. ⓒ 배혜은
이후, 현재 웨스트번드 뮤지엄에서는 2024년부터 진행된 제2기 협력 프로젝트로 퐁피두 센터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앙 브리앙(Christian Briend)이 기획한 상설전 <Reinventing Landscape>(2025.4.29~2026.10.18)가 열리고 있다. 퐁피두센터의 클래식 소장품들로 구성된 이 전시는 풍경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대미술사를 새롭게 조망한다. 같은 층에서는 또 하나의 특별전이 관객을 기다린다. 중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플럭서스(Fluxus)’ 대규모 회고전 <Fluxus, by Chance>(2025.9.26~2026.2.22)다. 1950~6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탄생한 선구적이고도 반항적인 예술 운동의 결과물을 만날 수 있다.
웨스트번드 뮤지엄 퐁피두 센터 협력 전시 포스터. / 필자 제공
이뿐만이 아니다. 미술관 지하로 내려가면 또 다른 예술 공간이 펼쳐진다. 영국 팝아트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의 첫 번째 몰입형 디지털 전시 <David Hockney: Bigger & Closer>(2025.4.29.~2025.11.30.)다. 호크니와 그의 팀이 3년간 공들여 완성한 이 전시는 예술가의 생애를 관통하는 여정과 디지털 매체를 통한 회화적 탐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시간대별로 영어 원어와 중국어 더빙이 교차 상영되며, 작품은 공간 전체를 채우며 감각의 경계를 허문다. 호크니의 수영장 연작부터 중국과의 협력으로 탄생한 영상까지, 회화와 기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호크니는 관람객들에게 '보는 방식'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건네는 듯하다.
<David Hockney: Bigger & Closer> 미디어아트 전시. / 사진. ⓒ 배혜은
웨스트번드 뮤지엄에서 하루를 온전히 보낸 적이 있다. 전시를 보고, 또 보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만큼 그 안에 머물렀다. 미술관과 연결된 카페 야외 자리에 앉아 황푸강을 눈에 담고,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강물이 만들어낸 여운 속에서 하루를 천천히 마무리해본다.
웨스트번드는 변화의 결이 워낙 다층적이라, 이곳은 한 번의 방문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다. 여러 차례 찾아가며 천천히 보고 느껴야 비로소 그 깊이가 드러나는 장소다. 웨스트번드에서 예술적 감성이 깃든 하루를 보내며, 상하이를 또 다르게 읽는 방법을 배워간다.